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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Aug 03. 2023

날것의 화해

혜빈이와 다은이 이야기

문을 열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붉게 상기된 얼굴의 혜빈이와 유체 이탈한 듯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서 있는 다은이가 보였다. 아이들 뒤에 다은이 어머니도 있었다. 다은이 어머니가 둘 사이를 가로질러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문을 살짝 닫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선생님, 혜빈이랑 다은이가 싸웠나봐요. 일단 데리고는 왔는데.”


내가 아이들이랑 얘기해본다고 하고 어머니를 먼저 보냈다. 아이들이 들어와서 손을 씻는 동안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원래 친한 아이들이었다. 지난주였나, 수업을 마치고 차를 타고 나왔는데 둘이 우리 집 근처 떡볶이집 앞에서 오뎅을 먹고 있었다. 둘은 나와의 수업이 끝난 뒤 영어수학 학원도 같이 가는 사이였다. 수업할 때 가끔 티격태격한 적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싸운 것은 처음이었다. 주로 문제를 제기하는 쪽은 혜빈이었고 다은이는 약간 소심하게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하는 편이었다.


원래 기다란 책상 양쪽으로 마주 보고 앉던 아이들이 오늘은 대각선으로 앉았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원래 하던 대로 수업을 진행해볼까 하는 야심을 품었다. “자, 먼저 책부터 꺼내고.“하는데 혜빈이가 소리쳤다.


"저 오늘 수업 못하겠어요!"


올 것이 왔다. 다은이는 그런 혜빈이를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눈을 내리깐다.


“너희들 무슨 일 있었니?”


둘 다 아무 말이 없다. 두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었다. 조금 뒤 혜빈이가 말을 꺼냈다.


“아니, 아까 쉬는 시간에 제가 다은이한테 과학실 같이 가자고 했거든요? 근데 다은이가 서하라는 애하고만 얘기하고 계속 저랑은 말도 안 하고.”


혜빈이는 마지막에 살짝 복받친 듯 목소리가 잠겼다. 내가 다은이에게 물었다.


“다은아, 혜빈이가 과학실 같이 가자고 했는데 다은이가 다른 친구하고 얘기하느라 같이 못 간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다은이는 벌써부터 숨이 찬 듯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서하라는 친구랑 얘기하고 있는데 혜빈이가 과학실 가자고 해서 저는 서하랑 먼저 얘기하고 있어서 나중에 가자고 한 건데.”


그 말을 들은 혜빈이가 말했다.


“그럼 언제까지 기달려야 되는데.”


“아니, 나는 서하랑 얘기하고 싶은데. (훌쩍) 서하랑 얘기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건데.”


다은이는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혜빈이가 말했다.


-서하랑은 나중에 통화하면 되잖아.

-서하 핸드폰 없어. 통화 못해.

-걔네 엄마 핸드폰으로 전화하면 되잖아.

-걔네 엄마 핸드폰 번호 몰라.

-나도 너랑 통화 잘 못하는데. 너는 왜 서하랑만 노는 건데.


혜빈이도 눈물이 터졌다. 독서교실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이해한 바를 얘기했다.


“그러니까, 다은이는 서하라는 친구랑 평소에 얘기할 시간이 많이 없어서 서하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혜빈이가 어디 가자고 하니까 서하랑 얘기를 못해서 속상했구나. 혜빈이랑은 여기서도 보고 다른 학원도 같이 다니니까 나중에 얘기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 아닐까?”


네. 저는 서하가 너무 좋고 친해지고 싶어요. 서하는 학원도 안 다니고 학교에서만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혜빈이는 다은이랑 평소에 친하게 지냈는데 다은이가 서하랑만 얘기하는 것 같으니까 다은이한테 좀 서운했던 거지?


“네.”


아이들이 오열한다.


“다은아, 서하랑 평소에 볼 시간이 없어서 그때는 서하랑 얘기하려고 그랬던 거지? 혜빈이가 안 소중해서가 아니라.


다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맞아요”한다. 나는 다은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혜빈이에게 다은이의 마음을 알려줬다. 그리고 꺼이꺼이 우는 아이 둘을 번갈아 안아줬다.


아이들이 그렇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며 싸우고 화해하는 것에 놀랐다.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화해해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랬는데 네가 이래서 어땠어. 이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저는 서하가 너무 좋고 친해지고 싶어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 신선했다. 이런 날것의 화해라니.


격정적인 감정의 파고를 지나 밋밋한 교재로 들어가려는 순간이 무척 어색했다. 꽤 많은 시간을 화해하는데 썼기에 오늘 계획한 수업을 마치려면 최대한 집중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은 조금씩 웃음을 되찾았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가방을 메고 독서교실을 나섰다. 문밖으로 “오뎅 사먹을까?” 하는 혜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다시 화기애애해졌고 기운을 되찾은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 말을 집중해서 듣고 둘을 화해시키느라 고심했으며 부족한 시간 안에 수업을 마치기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 탈진하여 그만 소파에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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