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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monkeystar May 26. 2022

나는 이제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압니다.

타국 생활 나는 부모님과 몇년 인연을 끊었었습니다. 

많이 외로웠습니다. 원래 북적거리는 가족의 일원이었고, 장녀인 저는 유독이 가족이 그리웠습니다. 

hollyday가 시작하는 9월 부터 newyear을 찍고 설날 정도 되면 가족의 빈자리에 울곤 했습니다. 


나의 아버지 평생을 성실히 일하시던 나의 아버지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이셨습니다. 학교를 포기하고 중학교 시절부터 자동차 공장에서 막일을 시작하시던 나의 아버지는 그 서운함에 자식들을 낳고 대학에 들어가 졸업을 하셨습니다. 



많은 상처가 있는 분으로 다정하게나 부드럽게 말을 하지 못하는 남자입니다. 하루에 20마디를 하면 많이 하는 사람이고 해도 소리를 지른다거나 서울남자 처럼 따듯하게 말을 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 이상형이 말을 다정하게 이쁘게 하는 사람이죠, 



그래도 우리 삼형제 돈독하게 자랐고, 유독히 자식들을 끼고 살고 싶어하시는 어머니와 많이 다투며 컸습니다. 나란 디자이너 언제나 모험을 좋아해서 안전함을 최우선으로 치는 우리 부모님과 어렸을때부터 많이 싸우곤 했습니다. 



나는 움직이며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들은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죠,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저란 여자 절대로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을 많큼 유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내가 간다고 말했을때 믿지 않았었는지 그래 갈테면 가라 그러더니, 진짜 비행기 티켓을 샀을때는 눈물을 글썽이더군요. 호기롭게 떠난 해외 생활이 얼마나 편안했었을까요? 굶고, 회사 잔반을 몰래 챙기고, 두판에 7.99하던 피자를 아껴아껴 한달 내내 피자만 먹기도 했었습니다. 



생리대가 없어서 회사 휴지로 화장을 지울때면 똑떨어져 고민 고민 하다 올리브유로 지워봤다가 얼굴도 뒤집어져 보구요. 회사 갈때 딱 10불 어치 기름을 넣으려고 동전을 모아 가져 갔는데, 막상 가보니 몇전이 부족해 다행히 한국인 주유소 사장님의 배려로 출근 할 수 있었던적도 있었습니다. 



집 렌트를 못낸 적도 학비를 못낸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웃으며 눈물이 핑도는데 그때는 어찌 그렇게 세상 원통하던지 그래도 꾿꾿히 졸업했습니다. 그 와중에 부모님과도 많이 싸웠지요. 나의 고생을 아버지는 속상함을 화로 표현했고, 나는 그런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한 5년간 연락은 안했드랬죠. 


세월이 흘러 나는 이제 아빠의 화가 속상함이였고, 빨리 돌아오라는 부탁이었다는것을 압니다. 자신의 능력이 꿈만 큰 그의 큰딸의 꿈을 도와 줄 수 없다는것에도 얼마나 슬펐었는지도 압니다. 언뜻 보면 사람들이 나를 금수저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블루컬러 노동자의 장녀입니다. 



고된 노동에도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바다로 캠핑을 다니던 나의 아버지,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야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고작 나의 나이에 그의 부모님과 세명의 자식을 이끌어 가던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 웠었는지요, 힘들다는 고되다는 소리 한번도 한적 없이 꾹꾹 눌러 참던 나의 아버지는 비록 사랑을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지만, 



언제나 그의 큰딸이 올까 기다리고 있었다는것을 압니다. 절대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내 고국을 떠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화려한 삶을 살았으나 언제나 공허하던 나의 가슴이 이제서야 빈자리가 채워지고 안정 되었으니까요. 



보고싶습니다 나의 부모님 부디 건강히 오래 살아계시기만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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