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Tree Mar 07. 2020

내 몸은 알고 있다, 그때 그 맛을

 그 맛은 기억이고 추억이다

이 나이 먹으니 시야는 흐려지고 기억력이 떨어져 적어 놓지 않으면 모든 걸 놓쳐버린다. 그런데 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기억이 있다. 내 몸이 알고 있는 어린 시절 그때 그 맛이다. 그리고 그 맛은 내 인생의 그 순간을 자동으로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다. 


그 옛날 빨아먹던 아이스 께~끼에는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치기 장난, 다방구, 술래잡기를 하던 즐거운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방과 후 친구들과 달려간 분식집에서 먹던 떡볶이, 쫄면, 만두, 비빔국수, 튀김, 맛탕에는 친구와 우정이 담겨있다. 그래도 내 추억을 소환하는 대표선수는 입학식과 졸업식날 먹었던 자장면이다. 지금도 내가 먹는 자장면에는 그 시절 입학의 설렘과 긴장감 그리고 졸업의 흥분과 쓸쓸함까지 모두 다 들어있다. 


어린 시절 그 초라한 한 가지 메뉴의 기억은 점점 더 또렷해지는데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 유명한 세프의 세련된 음식, 독특한 외국음식 그리고 뷔페 음식은 아무것도 추억할 수 없다. 내 입맛이 소박한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 그 음식에는 내 인생의 장면 장면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TV에는 수많은 음식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있다. 맛집 소개, 요리경합, 세프의 조리법 등등. 나는 매년 한국에 가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속기사처럼 메모를 한다. '이번에는 이 맛집에 꼭 가보리라, 저 유명한 세프의 식당에도 가봐야지, 저런 호텔 음식도 먹어봐야지...'라고 다짐하면서. 


13시간 30분의 비행을 끝내고 새벽 4시에 인천공항에 내리면 내 몸은 이미 지령을 내린다. 지하 푸드코트에 있는 칼국수를 먹어야 한다고.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먹는 칼국수에는 엄마의 손맛이 느껴지고, 집에 돌아온 안도감이 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팥빙수를 먹지 않았다. 미국에서 파는 팥빙수는 좀 과장해서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시커먼 통조림 팥, 시럽이 잔뜩 묻은 번지르르한 과일, 아이스크림, 견과류, 미숫가루, 떡, 연유 등등을 쌓아 올린 뒤죽박죽 팥빙수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토핑 중에 어느 맛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겠고 수 십 가지가 섞인 비빔 팥빙수의 맛은 절대로 조화롭지 못하다. 그런데 몇 해 전 한국에서 그 옛날 내가 먹던, 내 몸이 기억하는 고운 빙설 위에 팥 하나 달랑 올라 있는 진짜 팥빙수를 만났다. 불그스레한 한국산 팥의 담백하고 은은한 단맛과 빙설을 살살 내려가면 적은 양의 우유가 그 밑에 수줍게 숨어있다. '아, 그래 이 맛이었어. 내 몸이 알고 있는 팥빙수는 원래 이 맛이지, 이래야지' 라며 아주 오랜 친구를 만난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한국 방문 때마다 '꼭 먹어보리라' 메모하고 다짐했던 새로운 음식은 내 몸이 알고 있는 어린 시절 음식들에 밀려버리고 만다. 결국 나는 매년 거의 똑같은 음식을 먹고 돌아온다. 비지찌개, 만둣국, 칼국수, 냉이 된장찌개, 청국장, 갈비탕, 미역국, 자장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아 이번에도 고급지고 새로운 음식 도전에 실패'라고 약간의 후회를 하지만 내 몸이 원하는 그 맛을, 추억을 뿌리칠 수는 없다.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아들이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내왔다.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 한국 마켓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40분을 단숨에 걸어가서 장을 봤다면서. 그런데 바나나우유와 요구 르크를 보는 순간 어린 시절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고 한다. 보내온 사진에는 김치, 김밥, 바바나 우유, 요구르트, 2% 드링크, 에이스크래커가 담겨 있었다. '몸은 알고 있었구나, 그때 그 맛을 그리고 추억을.' 


아들의 몸이 기억하는 바나나 우유와 요구르트  맛, 그리고 어린 시절 추억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 없는 사람 손 들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