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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Tree May 28. 2020

J, 멈추지 않는 그리움

이별 그 후 

J와 나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동갑이며 같은 시기에 미국에 왔고 이 광활한 땅에 수많은 집 중에서 같은 아파트의 위아래층에 살았다.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고 심지어는 동갑의 남자아이들을 키웠다. J와 나는 그렇게 35년을 같이 붙어 지냈다. 지난 2014년 그녀가 하늘로 떠날 때까지....


삭막한 미국의 한 귀퉁이에 떨어진 우리 둘은 곧바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우리 둘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꽤나 독립적이고,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당장 미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야하는 막막한 고3이었다. 


학교 밖에서 만날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이 필요했지만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 타코벨 (Taco Bell)이라는 타코 체인점이었다. 보라색, 핑크색 그리고 황토색으로 칠해진 낡은 타코 집은 자동차 없는 우리가 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아지트였다. 난생처음 맡아보는 고수에서는 쉰냄새가 났고 멕시코의 향이 풍기는 타코 집은 매스껍고 퀘퀘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냄새에 점차 익숙해졌고 타코벨에 가는 횟수도 늘어났다. J와 나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낯선 곳에서의 쓸쓸함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대학에서 같은 기숙사 생활을 했고 4년 내내 붙어다녔다.  어느 날 J는 숨을 헐떡이며 책 한 권을 들고 캠퍼스 카페에 나타났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였다.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J와 나는 놀라고 감탄하고 기뻐했다. 우리는 전혜린의 '절대적 지식', '자아', '자유'에 열광하며 이런 글귀를 노트에 적어두곤 했다. 


"격정적으로 사는 것 -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아무 곳으로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 (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이후 우리는 한국에서 같은 시기에 아이를 출산했고 한 동네에 살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나면 전화기로 우리의 만남을 이어갔다. 남자아이들의 엉뚱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토로하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우리는 다시 미국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면 귀국해서 강원도에 들어가 살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강원도를 몹시나 좋아했던 J는 강원도에서의 노후 생활을 열망했고 꽤나 구체적이었다.  J는 첫째 아들을 아이비리그 대학에 보냈고 둘째 아들이 고2를 끝낼 무렵 아랫배가 자주 아프다고 호소했다. J는 아주 심한 햇빛 알레르기로 수십년간 고생을 했고 우리는 둘 다 요통, 위염, 불면증 등 골골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또 지나가는 작은 불편함으로 생각했고 내가 늘 먹는 위장약을 사 먹으라고만 했다. 그런데 2013년 1월 18일 J는 이런 문자를 남기고 한국행 밤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많이 아프단다. 오늘 만난 의사가 당장 한국으로 가래....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일상이 기적이구나. 가서 연락할게"라고. 나는 숨이 차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두려웠다.


J는 12시간이 넘는 대수술과 15번이 넘는 항암치료를 받았다. J가 투병하는 21개월 동안 그녀의 남편은 초인간적으로 그녀를 보살피며 최선을 다했다. 내가 멀리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 수시로 이메일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우리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내고 지난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고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용기의 말을 보냈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J가 떠나기 4개월 전 서울에 가서 그녀를 만났다. 병마와 싸우느라 야위고 지쳐있는 J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 낯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날마다 J의 병실로 찾아가 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J는 심한 통증 때문에 이미 몰핀주사를 맞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짬짬이 많은 얘기를 나눴고 함께 웃었다. 하루는 J와 함께 바퀴가 달린 링거대를 끌며 병실 복도를 걸었다. 그녀와 팔짱을 꼭 끼고 한참을 걸으면서 우리의 어린시절과 아이들, 완치에 대한 희망 그리고 강원도에 대해서 얘기했다. 나는 그때 그 팔짱 낀 J의 체온을 지금도 고스란히 느낀다. 


서울을 떠나기 전날 J에게서 전화가 왔다. 몇 시쯤 병원에 올거냐고... 나는 그때 압구정동에 있었는데  J가 입원해있던 병원이름이 적힌 버스를 보고는 얼른 올라탔다. 그런데 그 버스는 강남의 곳곳을 샅샅이 훌고 돌고 돌아 거의 한 시간 반 만에 병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맨 뒷자리에 앉았던 나는 이미 심한 멀미로 몹시 고통스러웠다. 병실에 들어서니 J는 거의 식사를 못하는데 힘든 몸을 이끌고 테이블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음식이 들어왔다. J는 내가 좋아하는 갈비탕을 미리 주문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심한 멀미로 인한 구토증과 복통으로 그 갈비탕의 반 도 채 먹지 못했다. 멀미를 했다고 말했지만 너무나 미안했다. 그리고 그것이 J와 나의 마지막 식사였다. 


2014년 9월 30일 J는 하늘 여행을 떠났다. 그녀가 떠나기 전 내 꿈에 두 번 나타났다. 일주일 전에는 옷 정리를 너무나 열심히 하길래 '왜 이렇게 옷 정리를 하냐'고 하니까 '이제 가야 해서 빨리 정리해야 해'라고 답했다. 그리고 떠나기 이틀 전에는 내 꿈에서 'OO아,' 그리고는 'OOO' 내 이름 석자를 너무나 또렸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꿈에서 그렇게 크고 선명한 소리는 처음이었다. 나는 놀라 잠에서 깼고 불안했고 슬펐다. 


J가 떠나고 여러날을 나는 우리가 좋아했던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중얼거렸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이제 9월이 오면 J가 떠난 지 6년이 된다. 그리고 J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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