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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Tree May 03. 2020

더 이상의 변신을 꿈꿀 수 없을 때

끝자락에서 새로운 시작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적힌 나의 장래희망은 늘 '기자'와 '아나운서'였다. 그리고 나는 많은 글짓기 대회와 웅변대회에 출전했고 전교생이 모이는 월요일 조회시간에 '이 변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라며 반공과 불조심에 목청을 돋우곤 했다. 고교시절에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글을 보내고 상품 받으러 가는 학생으로 방송국을 드나들면서 내 장래희망을 이어갔다. 미국 대학에서 어렵사리 신문방송을 공부하면서 그때까지 내 인생의 시간표는 꽤나 치밀했고 나름 계획한 대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반 때 KCET라는 교육방송국에서 인턴십을 했는데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내가 미국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글을 쓰고 말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가 외국 홍보대행사에서 비슷한 일을 했다. 


인생 시간표 어디쯤에 넣어야 할지 몰랐던 결혼을 하고 출산, 육아에 치우치면서 내가 하던 일을 그만뒀다. 허락받지 않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절대적 책임감, 조절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은 험한 바깥세상에서 아이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독립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꼬박 18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집을 떠난 후 나는 깊숙이 접어둔 나의 장래희망을 조심스럽게 들추어봤다. 중간중간에 신문기사를 쓰곤 했지만 나의 단절은 너무나 길고 깊었다. 조직, 기술, 정보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까지...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은 너무나 많이 변했고 나는 더 이상 세상과 연결할 수 없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 60. 나는 회복 불가능한 단절과 더불어 절대적 역량 미달이다. 오랜 시간 미국에 살면서 나의 언어는 길을 잃었다.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다수의 사람들이 촘촘히 얽혀있는 소셜 네트워크 거미줄망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컴퓨터 엑셀은 하면 할수록 복잡하고 어렵다. 그리고 이제 돋보기 없이는 젓가락의 위와 아래를 구분하기가 어렵고 내 기억력은 저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인생의 휴지기에 '변신'을 꽤 할 수 없을까 골똘히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처럼 모르고 있던 재벌 할아버지가 나타나거나 로또에 당첨되는 그런 변신은 아니라도 '변화'에 목이 말랐다. 수십 년 만에 재취업을 시도해봤으나 그것은 흠뻑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그런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기와 자신이 없었다. 


변신과 변화를 꿈꾸던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은 처절하고 가혹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살았던 나는 정말 초라한 숫자의 친구밖에 없다. 마치 인간관계 손절한 사람처럼. 다섯 손가락이 남는 내 친구 중 35년을 함께 한 J는 어느 날 들이닥친 병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고, Y는 두 번째 찾아온 암과 투병 중이다. 삶이 이러하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데 '변신'은 착각이며 낭패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변신'의 정체는 내 불안과 고립이었음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소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나만의 작은 시작이 필요했다. 어느 날 우연히 '브런치'에 실린 스쳐 지나는 좋은 글들을 만났다. 그리고 한참만에 용기를 냈다.  보잘것없는 작은 '시작'을 '브런치'와 함께 해보기로 했다. 내 이야기는 새롭거나 흥미롭지 않으며 구닥다리지만 그저  맘 가는 대로 써보기로 했다. 꼬깃꼬깃 접어 묻어둔 채  끝났을 내 장래희망의 마지막 끝자락을 다시 붙잡을 수 있어 나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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