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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ie Bomi Son 손보미 May 20. 2017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드 보부아르 ‘행동하는 지성으로’ 외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20세기 ‘페미니즘의 성서’, ‘여성 운동 최고의 스승’, ‘페미니즘의 어머니’ 등과 같은 말들로 표현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성 지성인이다. 그녀가 1949년 발표한 저서, <제2의 성 Le Deuxieme Sexe > 의 영향은 컸다.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인 샤르트르의 연인이자 지적 동반자로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그녀는 프랑스의 보수적인 철학적 전통 안에서 선진적인 여성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기억된다.



당시 20세기 초 프랑스는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았고 피임과 유산도 불법이었다. 부르주아 출신임에도 철학을 공부하고 제도화된 결혼을 거부하며 남성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삶을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도발적이며 무모했고, 시대를 앞선 용기와 치열함이 가득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아이들은 남자가 되도록 키워지고 여자아이들은 여자가 되도록 키워진다는 생각이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여기서 여자란 부수적인 것, 종속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보부아르가 인용한 고대 철학자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여자는 혼란과 어둠과 함께 나쁜 원리를 대표한다. 질서와 빛, 그리고 남자는 좋은 원칙에 해당한다.’라고 했다. 저명한 고대 철학자의 말이 지금의 시선에서는 말도 안된다고 느끼는 걸 보니, 그간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많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21세기에 들어서 몇년전 전세계는 알파걸의 열풍이었다. 여성인데도 남성과 비교하여, 공부, 운동, 대인관계 등 어떤 부분 하나 뒤쳐지지 않고 혹은 더 뛰어난 엘리트 계층의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 ‘알파걸’이었다. 그녀들은 자신감, 자긍심, 열정이 넘쳐나고, 진취적이며 도전의식도 강하다. 성실하고 낙천적이면서 실용적이다. 관심의 영역도 넓다. 개인주의 성향이 짙지만 평등주의와 이상주의를 추구한다.


하버드대 아동심리학과 댄 킨들러 교수가2006년 그의 저서 <알파걸, 새로운 여성의 탄생>을 통해 ‘알파걸’은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미국 10대 엘리트 소녀들을 의미하는 알파걸은 ‘최상’ ‘으뜸’ 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그리스어의 첫 자모인 알파(α)에서 유래했다. 1900년대의 전세계 페미니스트들의 눈물어린 투쟁을 했던 혁명을 만들었던 여성들의 딸들이라는 의미의 ‘혁명의 딸들’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킨들러 교수는 ‘알파걸’이 보부아르가 쓴 1천여 페이지가 되는 책 ‘제2의 성’ 에서 예견한 대로 탄생한 것이라고 설명한바 있다.


보부아르는 몰락해가는 상류 부르주아 가정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10살 때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고 가톨릭 계통 학교를 거쳐 19살 때 소르본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1929년 21살 때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차석이자 최연소로 합격했다.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지적 동반관계를 추구하며 프랑스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보부아르는 훗날 경제적 사회적 평등의식이 있고, 가능성이 무한대인 여성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킨들런 교수가 말했듯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여성들의 잠재의식을 일깨우고, 이후 세대에게 길을 터줬다. 알파걸을 포함해 모든 현대 여성들이 이룩했던 수많은 변혁이 그녀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20세기나 21세기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다수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다. 페미니즘=호의적이지 않은 단어. 여성들도 페미니스트로 분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표현이 너무 강하고, 너무 공격적이고, 남성들이 싫어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립시기며,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불편한 단어가 되었을까?


페미니스트란 여성의 인권 신장과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보부아르가 ‘페미니즘의 어머니’라 불리는 것은 개인 내면에 머무르는 실존 철학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를 추구하는 철학을 따라 사회 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사회의 불의와 부정에 항의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등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970년대부터 여성 해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성 노동자 권익 보호, 가정 폭력 근절등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그 덕분에 프랑스에서는 어머니의 날을 제정되었다.



2014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영화 배우 엠마 왓슨 Emma Watson 이 여성에 관한 연설을 해서 세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2001년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를 통해 데뷔한 뒤, 브라운대학을 졸업한 왓슨은 UN여성을 위한 굿윌 홍보대사직을 맡으면서 세계적인 배우로 영향력 있는 활동을 보인 그녀다. 유엔 여성 친선대사로서 연설을 앞두고,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는 연설시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쓰지 말라는 권고했다고 한다.


총회에서 왓슨의 연설은 100단어도 채 안됐지만 그녀는 “페미니즘에 관해 더 많이 말할수록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너무나도 종종 남성혐오와 동의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가 (여성과 남성에 대한) ‘편가르기’라고 느끼기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참여시켜야 할 캠페인의 본래 목적이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라고 전했다.  


왓슨은 당시 권고를 받고 고심했지만 결국 ‘페미니즘’을 연설문에 넣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마지막에는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여성들마저 사용을 주저한다면 어떻게 남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왓슨의 유엔본부 연설은 여성인권운동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명연설로 꼽힌다. 성평등을 위해 여성만이 아닌 남성의 적극적 참여와 연대를 촉구한 이 연설로 히포쉬(He For She·그녀를 위한 그 남자)가 탄생했다. 이 연설을 계기로 여성인권 캠페인 ‘히포쉬’가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톰 히들스톤, 조셉 고든 레빗 등의 영화배우를 비롯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이 지지하기도 했다.


현재의 2030대 젊은 여성들은 어릴 때 부터 남녀는 평등하다고 교육받았다. 다행히 이전의 세대들이 1890년대부터 ‘여성 해방 운동’의 개념으로 ‘페미니즘’을 연구하고 선도하면서 사회적인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찾았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교육받은 것과는 달리, 여자는 성장해 가면서 사회의 강요와 구속을 한층 더 노골적으로 받는다.



2013년 기준 전세계의 여성지도자가 있는 나라가 18개국이나 되었다. 10년전에는 과연 여자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놀라운 숫자이다. 그러나 우리 일상은 어떤가? 여전히 여성은 스스로 ‘여자다움’이란 굴레를 쓰게 만드는 환경에 처해 있지 않은가? 여성의 정의는 역사적으로 남성들의 시각과 가치를 통해 규정되어왔다. 남성이 지배하는 문화는 여성을 경제적, 정치적, 육체적, 정신적, 법적, 역사적으로 억압받는 존재로 만들었다.



문제는 여성이 독창적인 삶을 개척해야 한다고 일깨워주는 남성은 물론 여성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한 때 JTBC 의 ‘최고의 사랑’ 이라는 만혼의 커플을 대상으로 가상 결혼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우먼 김숙과 개그맨 윤정수에게 보내는 대중들의 호흥이 뜨거웠다.


김숙 가모장적인 발언 (MBC ‘라디오스타’ 중에서)

1. 남자는 조신하게 살림하는 남자가 최고, 그깟 돈이야 내가 벌면 되지.

2.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집에 있는 남자라도 웃어줘야지~

3. 남자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망신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명의 코믹 요소뿐 아니라 기존의 ‘가부장적’인 요소들을 풍자하며, ‘가모장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가정 내에서 일하는 여성의 파워를 재미있게 구성해서 많은 여성들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런 부분에서 현대의 여자들은 속 쉬원한 느낌을 받는 느낌도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 지위를 가져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간 남자들은 남녀 역할 분담으로 인한 차별장치를 만들어 두고 이를 ‘불평등속의 평등’으로 미화해 왔지만, 이제는 남녀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성 차이 속의 평등’을 모색해야 할 때가 됐다.


 “여자들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남자들이 베푸는 것만 받아왔을 뿐이다. 여성들은 단 한 번도 독립된 계급을 형성하지 못하고 그냥 운명에 체념해왔을 뿐이다.”  


보부아르의 말은 지금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 역사가 만들어준 여성의 정체감과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 스스로 노력해야 할 때이다. 21세기에 우리가 꿈꾸어야 할 여성해방은 인간으로서 남성과 평등한 기회와 권리를 찾기 위한 일상의 작은 변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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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가 손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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