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독립에도 불구하고 결합을!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독립에도 불구하고 결합을!"
최초의 #페미니스트 로 알려진 영국의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 이후에 프랑스에서 여성 운동에 한 역사를 만든 #시몬드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1908~1986) 그녀의 저서 ‘ #제2의성 ’은 전 세계에 이슈를 만들었죠.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와 계약 결혼으로 지적인 동반자와의 삶을 선구적으로 살았던 여성. 사랑과 지성미, 진보적인 그녀의 지성과 행동에 감동받아 그녀를 공부했던 내용을 함께 공유합니다.
샤르트르는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본질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B(탄생 Birth)에서 D(죽음 Death) 사이의 C(선택 Choice)이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이 되고도 수상 거부를 했던, 장 폴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e)로 유명한 철학자는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사르트르, 니체, 보부아르가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인데요.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not merely the thinking subject),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master)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던 거죠.
실존은 ‘인간’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역전되게 됩니다.
남성과 여성은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실존한 거죠. 그런데 여성적이다라는 여성의 모성애, 애교, 조숙함 등도 함께 태어난 것일까요? 이런 실존주의에 의하면, 태초에 정해져서 나온 게 아니라, 여성들이 태어나고 보니, 이 사회에게 이런 성질을 여성성으로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의 산물이라고 생각한 것이 보부아르죠. 사회적 구조의 모순 때문에 강요받는 여성성에 문제의식을 표현했습니다.
보부아르는 여자는 결혼해서 가정에 전념하는 게 바른 것이라 여겨지던 시대에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직업을 갖는 길을 택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교사가 되었고, 어린 시절의 꿈대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쓴 <제2의 성>은 고대 신화 분석은 물론 인류학, 심리학, 철학에 대해 해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지식을 두루 동원해 여성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런 보부아르에게도 남모를 아픔이 있었어요. 귀족 가문에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전쟁으로 가난해진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친구 자자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제 2의 성>을 출판한 뒤에는 책의 내용에 분노한 남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글을 쓰고, 여성 운동을 했습니다. 시몬은 여성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 조사와 연구를 했습니다.
여자가 여성스러운 이유는 여성스럽게 태어나서가 아니야. 남성 중심인 사회가 여자를 지배하기 위해 순종, 사랑 등을 여성의 가치라며 길들였기 때문이지. 심지어 결혼이라는 제도와 모성애조차 남자들이 자신들의 대를 잇기 위해 여자들을 세뇌한 결과물일 뿐이야.
프랑스는 타 국가보다 여성 참정권이 상당히 뒤늦게인 1944년에 인정되었는데요. 타 국가를 살펴보면, 영국은 1918년에는 30살 이상의 여성과 1928년에는 21살 이상의 여성의 참정권을 주었습니다. 미국은 1920년, 뉴질랜드는 1893년, 오스트레일리아는 1908년, 노르웨이는 1913년이었습니다. 그 몇 가지 원인 중 하나는 출산율을 늘리고 인구 감소의 주된 위기에 맞설 방안으로 산아 증가 옹호 정책이 20세기 중엽까지 공산당과 사회당을 비롯한 정당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피임과 낙태는 불법이었으며, 여성을 전통적인 아내와 여성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만들려는 거대한 정치적/사회적 압력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프랑스 여성들은 1983년까지도 줄곧 법적인 소수자로 여겨졌으며, 이러한 상황은 1960~1970년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여성의 피임 권리는 1967년에, 낙태권은 1974년에, 직장에서 일하고 남편의 동의 없이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는 1956년에야 인정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그녀는 교사로서 일반적인 여성과는 다른 교육과 사회참여에 대해 열린 기회를 가지게 된 특수 케이스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결혼과 아기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보편적인 여성들보다는 이를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죠.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심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이를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성에 응시에 소비되는 수동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아내와 어머니 역할에 헌신하는 것. 남성이 여성 자신의 삶에 책임성 있는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인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 대해 역사적,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적, 문학적으로 분석하게 됩니다.
보부아르는 중등학교 철학 교사로 근무 중에 지적인 동반자 샤르트르와 21세에 만나 사랑에 빠졌고, 죽는 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했고 행복했던 것은 샤르트르를 만난 것이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죠. 몽파르나스에 같은 묘지에 묻히기도 했습니다.
둘의 사랑은 어떻게 커갔을까요? 사르트르는 1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보부아르는 아버지와 정신적으로 맞지 않아, 그를 잊고 살아갔습니다. 서로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더 의지하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모르겠네요.
1929년 샤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색다른 제안을 하나 했어요.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 아래 두 사람이 계약결혼을 하자는 것이었지요. 서로에게 거짓을 말하거나 속이지 않고, 일과 사랑, 계획, 지난 경험들을 상대방과 늘 공유하며 솔직하게 말하기로 약속한 뒤 보부아르는 이 제안을 수락했고, 결국 그들은 계약결혼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이들의 결혼을 손가락질했지만, 이들은 1929년부터 반세기 동안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는 서로 구속하지 않으면서 연인이자 지적인 동반자로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한 그들은 “우리는 한 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서 두 사람의 정신적 교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결혼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랐습니다. 첫째, 서로가 다른 사랑을 하는 것을 허용할 것. 둘째, 거짓말하지 말고 서로에게 솔직할 것. 셋째, 경제적으로 독립된 생황을 할 것이 그 조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결혼을 “평등을 기반으로 자유를 추구하며 이상적인 관계를 이루어 보려던, 그들의 철학이 반영된 시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평생 서로를 ‘영원한 연인’이라 부르며 사랑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설의 커플로 사람들의 기억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 여성의 지위를 살펴보면, 1908년 3월 8일, 미국의 1만 5천여 명의 여성 섬유 노동자가 정치적 평등권 쟁취와 노동조합 결성,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남성들보다 차별받고 억압받던 여성들은 권리 확보와 지위 향상을 위해 지속해서 노력했고, 그 결과 여성 참정권 쟁취, 호주제 폐지 등 성과를 얻을 수 있었어요. 또한,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1908년 3월 8일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제정했습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답니다.
2011년 세계경제포럼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의 성평등 지위는 전 세계 135개국 중 107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2018년에는 149개국 중 115위를 기록했습니다.
<제2의 성>을 통해 여성들에게 자의식이 생기게 했습니다. 여성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성취하려면 여성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며, 정치적으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른 여성들과 함께 인식해야 합니다. 여성과 남성의 진정한 관계는 모든 인류의 궁극적인 이익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로서 인식하는데 기반하는 것입니다.
보부아르는 실천하는 지성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데요. 말은 하기 쉽지만, 행동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그녀의 삶과 글, 철학이 역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실천하는 삶이었기에라고 생각해요. 저도 이 분을 본받아 어려운 상황에 부딪혀도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