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병욱이 Apr 08. 2023

착각

22. 04. 07 동검은 오름과 높은 오름 사이




너무 게으름을 피웠던 게 아닐까. 밤늦게 잠에 빠져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곤욕이다. 아래로 아래로 눈동자를 반쯤 뒤덮은 눈꺼풀 위로 찬물을 끼얹는다. 하루하루의 시간이 그랬듯 아침밥을 챙겨먹고 버스 시간을 쫓아 맞추어 움직여야 하기에 숨 돌릴 틈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반쯤 감긴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버스 시간에 맞혀 숨 돌릴 틈없이 달렸다. 아침 거리엔 요일을 잊은 채 만개한 벚꽃 구경에 빠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루에 4번 금백조로를 따라 운행하는 버스에 겨우 올라타고 1시20분이 흘러서야 백약이 오름 입구에 도착한다. 머리속엔 갖갖이의 경로를 이미지화하지만 이미 몸은 버스에서 내려 망설임의 늪에 빠졌다. 오름만 오를 것인가? 아니면 오름 더하기 마을을 탐방할 것인가? 굳건히 다잡았던 마음은 변덕이 죽 끊듯하다. 눈앞에 뻔히 바라보이는 백약이 오름을 그냥 떠나기에는 아쉽고 오름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다.

오름의 정상을 쫓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넋을 잃은 채 멍하니 발을 움직인다. 귀신에 홀리지 않고 이럴 수 있을까.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하마터면 하루 일과가 아닌 평생을 잃을뻔한 끔직한 순간을 모면했다. 오늘만큼은 점점 황폐해져 가는 백약이 오름을 오르지 말고 떠나라는 오름의 충고로 들린다. 나를 구해준 운전자에게 욕을 먹긴 했지만, 나 또한 적잖이 놀란다.

"조심하자고 이 바보야. 조심! 조심!"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놀란 가슴을 추스리며 서둘러 맞은 편의 오름으로 방향을 돌린다. 몇 백미터 밖에 안될 거리지만 100m도 못가서 눈병이 날 판이다. 새(띠)를 기르던 밭은 새로운 말 목장으로 개장하고, 마구간으로 추정되는 공간 아래 누워있는 몇 마리의 말이 발목을 잡는다. 마구간 앞으로는 싱싱한 풀이 가득하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반짝반짝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갈귀가 바람에 휘날리며 멋짐을 뽐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잘난 척 풀 밭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는 녀석도 보인다.


가방에 든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너희들도 냉큼 일어나 풀밭으로 가라며 등을 떠밀지만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어쩌면 말 울음소리에 반응할지도 모른다.

 

“이히히힝~ 이히힝~~”


말과 대화를 시도해보지만 허사다. 그렇다고 효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미동도 없는 녀석들에 비해 어떨결에 단 한마리의 말이 반응을 보인다. 귀를 종끗 세우고 까딱거리는 목. 드디어 모든 말들에게 동요를 불어 일으켰다. 굼뜨지만 기지개를 펴며 말은 조금씩 움직였고 응원을 보냈다. 다시 한번 또 다시, 다시 말에게 전격신호를 보냈지만 움직임은 생각대로 진천이 별루다. 풀밭이 아니 다른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말들. “야 그쪽이 아니라고” 이럴때 도라에몽의 통역 곤약이라도 손에 쥐었다면 한방에 끝낼 수 있을텐데 먼 미래가 부럽다.


몇분뒤에 그럴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문이 닫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제까지 뭘한건지 머리만 멍해질뿐이다.


오름 입구에 다르기 전 시끌벅적한 의외의 대화 소리가 오랜만에 귓가를 울린다. 어떤 면에서 혼자가 아니란 것에 좋았지만  불안감을 유발한다. 점점 드러나는 실체를 마주하자 불안을 안은 기대는 숲 속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져 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파에 넋을 잃어버렸다. 한명 아니 족히 스물명은 되어 보인다.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은 아니지만, 감내하자고 마음을 다독이며 오름의 능선에 몸을 실는다. 마음은 커다란 바위를 안은 냥 무거워졌다.


20이란 숫자는 그저 시작이었다. 능선을 따라 줄줄이 사탕이다. 뭔가 잘못 되었음을 직감한다. 그동안 말하지 말이야 할 천귀누설을 떠들고 다녔던가 하는 자책감마저 든다. 이내 더 큰 산이 가로 막았지만 받아들이기로 하며 가파른 능선을 멈추지 않고 단숨에 오른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마스크 안쪽은 난리가 났다. 제대로 호흡조차 하기 힘들다. 코와 입으로 정신없이 산소를 흡입하지만 역부족. 할 수 없이 주변을 살피며 마스크를 들어올려 산소공급에 나섰다. 몇번의 주입을 끝마치고 처음으로 돌아온 심장박동의 안락이다.


20명, 30명이면 족할거란 줄줄이 역인 사탕은 착각이었다. 어디 숨어있다 나타난 사람들은 오름을 점령했고  뿔뿔이 흩어져 쉬이 접할 수 없는 자연을 느꼈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행복을 느끼는 그들과 반대로 자연은 그렇지 못하다. 2년 전에 휴지기에 들어갔던 용눈이 오름의 모습이 생각났고 화가 치밀러 오른다. 한 두명이였다면 통제가 가능했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통제불능이다. 오름이 내어준 그대로를 지켜줄거라는 생각은  오만이자 착각이다. 또 다른 용눈이 오름의 참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격을 수 없다. 그들만 바라보며 태연했던 침묵이 깨어나고 입은 쉴새없이 바빠졌다.


“저기 아저씨 정해진 길로 다녀주세요."

"저기요. 여기에서 식사를 하면 안됩니다.”


내것도 아닌 공간에 서서 오름 감시원을 자청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어떨까. 뒤돌아서 욕을 퍼붓을지라도 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퍼붓는다.

오지랖이라고 볼 수 있지만, 현재만큼은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정의감이다. 그렇게 인파가 사라져 갈때 쯤 꽁무니를 따라 다음 오름을 향해 급히 발길을 옮긴다. 착각의 늪에 빠진 나는 그들의 꽁무니를 끝으로 다음 행선지로 갈 길을 채촉한다.

빼곡한 나무 사이로 눅눅하게 녹은 시멘트 길.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까마귀까지 울어댄다. 봄은 꽃을 피웠지만 이 거리만큼은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동검은 오름을 오를 때 달려들 듯 까마귀를 떠올리면 온몸에 털이 곤두선다. 모세혈관은 모든 감각의 신경을 두뇌로 전달하며 오로지 시신경에 집중된다.

1분은 마치 10분을 걷는 것 같은 몸의 움직임이다. 어떤 녀석이라도 다가오면 끝장날 각오를 다지라는 위협으로 가방 옆에 꽂혔던 3단봉을 꺼내 휘두르며 힘을 과시하는 모션을 취해본다.    

하모리 알뜨래 비행장처럼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넓은 풀밭이 나왔다. 긴장에 잔뜩 쫄았던 신경이 하나, 둘 풀렸고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그때 비로소 주변의 모든 것이 행복을 맛보던 그 시간으로 돌아선다. 또다시 서로를 응시하며 마주하게 된 나와 말이 인사를 나눈다. 이번에는 1:1 내향적인 나에게 있어 최적의 시간이다.


"이히히힝힝~~"


매거진의 이전글 뱅듸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