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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박재관 May 16. 2021

우울증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라깡의 루브르 - 백상현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미술작품들을 통해 라깡의 사상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조금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을 완화해주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용어들은 낯설다.


박물관은 하나의 정신병동이며 예술작품들을 그 증상의 결과물로 간주한다. 정신분석이란 환자 자신에 의해 건설되어 유물들의 배치가 완료된 개인사 박물관의 문을 여는 행위이며, 그곳에 환자와 함께 들어가는 재방문의 행위라고 말한다.


라깡은 프로이트를 계승하며 그 단점을 보완하려고 했다. 프로이트는 거의 모든 것을 성적 욕구에 연관 지어 설명했지만, 라깡은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을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지표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인간은 말을 배우는 단계에서 신경증, 정신병, 성도착증 중 하나로 편입된다고 한다. 처음엔 인간은 모두 정신병자라고 말하는 건가 하고 깜짝 놀랐다. 신경증에는 강박증과 히스테리가 있는데 라깡은 이들을 정상인의 범주로 분류한다. 다행이다. 안심해라. 강박증과 히스테리 정도는 정상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을 배우는 단계’에서 세 가지 유형 중 하나로 편입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이란 ‘주이상스’라고 불리는 쾌락의 중핵을 ‘언어로 둘러싸면서’ 발생하는 독자적인 마음의 구조라고 한다. 정신병 환자란 유아기에 언어의 상징적 규범이 안정적으로 구성될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병은 말을 배우는 시기에 결정된다고 보면 될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그러니 미운 세 살이라고 윽박지르면 안 된다.


정신병 환자들은 애도가 불가능한데 애도란 유아기에 상실해야만 했던 주이상스를 포기하는 절차들이며, ‘상실의 근원적 심연’을 피해 가는 문명의 과정이라고 한다. 결국 문명이란 것은 애도의 다양한 양상들로서 주이상스를 포기하고 피해 가기 위해 언어를 통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거다.


문명의 발생에는 신화가 특히 중요한데 신화의 기능은 정신의 안정을 위한 열쇠와 같다고 한다. 신화는 하나의 현실을 다른 하나의 현실로 은유하는 구조이며, 인간 언어의 본질적 기능이 바로 이러한 은유의 끝없는 순환이라고 말한다. 언어란 이 말을 저 말로 바꿔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거다. 바꿔 말하기만 해도 사람은 안정이 되고 믿음이 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조삼모사'에 잘 속는다.


이런 문명이나 신화 또는 언어가 허상이라는 걸 깨닫는 게 진리라고 작가는 말한다. 불안이나 우울은 진리를 맛본 주체가 지불해야 하는 일종의 댓가라고 한다. 삶이 기만적인 이유도 거짓만이 우리를 치명적인 진리로부터 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애매모호나 알쏭달쏭의 뜻으로 잘못 알고 있는 멜랑꼴리는 정신병의 일종이다. ‘주요 우울증’이라는 병명으로 분류되는 멜랑꼴리 환자들은 어떤 논증도, 추론도, 또는 경험도 없이 이런 치명적인 진리에 이미 도달한 것이라고 한다. 신경증과는 달리 이런 정신병적 구조는 완치될 수 없고, 환자의 자아를 비난하고 파괴하려는 강력한 초자아를 가졌다고 한다.


승화는 우울증에서 환자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인데, 승화란 일종의 쾌락으로서 충동보다는 덜 파괴적이고, 욕망보다는 더 강렬한 것이라고 한다. 충동의 파괴적 에너지를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형태로 길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승화란 거짓된 삶을 거부하고, 우울증의 허무 속에 머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삶의 하얀 거짓말을 스스로 시작하게 되는 계기의 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삶의 환멸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사는 것임을 깨달아야 그로부터 우리는 살아진다라고 말한다.


작가가 이책에서 말하는 핵심은 ‘삶에는 의미가 없는데, 그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인간’이라는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인간 존재가 가진 유일한 의무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각자의 차원에서 재발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 의식은 언어화된 마음의 구조이고, 무의식은 언어화되지 않는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본능이나 호르몬 작용이 아닐까 싶다. 프로이트는 이 무의식을 성충동이라고 봤고, 라깡은 욕망이라고 봤다. 또한 무의식은 꿈이나 통찰력과도 연관이 있다고들 말한다. 여전히 무의식은 아직 밝혀진 바가 많이 없다.


분명한 건 우리는 의식이나 무의식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설사 의미 없는 삶이 진실이라도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는 '재정의'나 '재발견'을 끊임없이 반복 해야 한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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