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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Aug 29. 2021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철학자와 늑대 - 마크 롤랜즈

난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결혼하고서는 와이프가 질색해서 못 키워 봤다. 키우다 정들었는데 죽으면 감당이 안될 거 같기도 하다. 물론 핑계다.


이 책은 작가가 직접 십여 년간 늑대를 키우며 느낀 점을 인간과의 비교를 통해 철학적으로 성찰한 글이다. 무엇보다 인간을 본질적으로 영장류라고 부르며 비판하는 관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영장류는 항상 어떤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효용성이 있는지 확률을 따져 계산한다. 영장류는 친구를 만들지 않고, 서로 연합하는 성향인데 그 이유도 자신의 목적 달성(섹스와 권력)을 위해서라고 하며, 계산이야말로 계약의 본질이자 영장류의 본질이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그래서 내가 밥값 낼 때 머뭇거리나 보다.


그에 반해 늑대는 계산하지 않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늑대는 진정한 관계는 결코 계약에 의해 성립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신의가 먼저라는 것이다.


사회적 계약이라는 것도 자신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받겠다는 것인데 영장류가 그렇게 하는 이유도 그 결과로 삶이 더 나아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와 도덕성의 목적이며 존재 근거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사회적 지능을 발달시키며 진화할 수 있었던 것도 다른 영장류보다 계산에 능했기 때문이고, 도덕이라는 것도 그걸 기반에 둔 거라는 거다. 반박할 수 없다.


도덕이나 윤리에 대해 얘기하면서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친딸을 성폭행하는 아버지와 그걸 방조하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은 보통 결과보다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 동기는 그리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소녀의 아버지가 자신은 잘못이 없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또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공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잘못이라는 걸 몰랐다면 무지 그 자체로도 사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악은 평범하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다.


늑대는 순간을 살며, 늑대에게 있어 행복이란 항상 똑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다. 인간은 반복되면 지겨움을 느낀다. 인간은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순간을 살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에 산다. 인간에게는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가는 행복 자체가 불편함을 끌어안고 있고, 즐거움과 불편함이 하나 되어야 완전한 행복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순간은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라 우리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때이며, 이는 곧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매우 끔찍한 순간들을 감내해 낸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행복은 고통을 견뎌야 온다.


늑대와 같은 야생동물을 길들이고 훈련시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난 부정적인데 작가는 오히려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면 본능이 약화되기보다는 자신감이 커져 더 침착해진다고 주장한다. 동물을 훈련시키는 것도 복종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 알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규율과 자유 사이의 관계는 심오하고, 규율이 가장 소중한 자유의 형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건 변명 같다. 물론 늑대가 저자와의 교감 속에 행복하고 자유를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등한 관계는 아니지 않았을까? 규율이 어느 정도 자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진정한 자유는 규율보다는 몰입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거 아닌가?


관계 사이에 적당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건 동의한다. 한 생명은 하나의 우주와 같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와 선이 없으면 두 우주가 충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권력적인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이어야 한다는 게 전제 조건이다.


삶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얻은 교감은 근본적으로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 감정은 계산할 수도 없고, 교감도 마찬가지다.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영장류이지만 늑대와 같은 삶을 추구하지 않으면 행복하기 어렵다는 거 같다.


나도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느끼고 있다. 감정을 공유했던 교감 같은 것이 오래 남는다는 걸, 그리고 나의 의지나 계획보다는 운이 많은 걸 좌우했다는 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주어진 운을 빼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끝에 가서는 철저하게 운만 남는다. 그리고 신들은 운을 주었을 때처럼 언제든지 앗아 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운마저도 다했을 때 남겨질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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