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알베르 카뮈
엄마가 죽어도 무덤덤하다. 죽은 엄마의 모습을 볼 마음도 없고, 밤을 지새우는데 졸음이 온다. 엄마의 정확한 나이도 모른다. 장례식 끝나고 푹 잘 생각뿐이다. 그럴 수 있다.
좋은 자리가 났다고 파리로 가라는 사장의 말도 단지 귀찮아서 거절한다. 그럴 수 있다.
바닷가에 수영하러 갔다가 마리라는 여자를 만나고 사귀게 된다.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냐고 묻자 나에겐 그런 건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한다. 결혼할 마음이 있냐고 묻자 원한다면 한다고 말한다. 그럴 수 있다.
포주인 레몽과 친구가 된 것도 자기는 아무 상관없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 같아서다. 그럴 수 있다.
레몽이 자기에게 칼질을 한 아랍인에게 총으로 복수하려고 하자, 그건 비겁하다고 말린다. 하지만 자기가 총을 대신 보관한다고 하고서, 바닷가로 나갔다가 그 아랍인을 발견하고, 햇빛 때문에 죽였다고 하는 건, 그럴 수 없다.
주인공 뫼르소에게 엄마는 큰 의미가 없다. 직장도, 사랑도, 친구도 별 의미가 없다. 귀찮아서, 그들이 원해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뒀을 뿐이다. 이렇게 삶에 별 의미가 없을 때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러다 극단적 허무주의에 들어서면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살인하는 것도 쉬어질까?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사건의 가해자 어머니 ‘수 클리볼드'가 쓴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서 자살하려는 마음, 즉 죽음에 대한 욕망이 학살에 참여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빚 때문에 자식을 죽이고 동반 자살하는 가장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난 동의할 수 없다.
뫼르소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거고,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변호사는 경악한다. 하지만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처럼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진실을 뫼르소가 말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형까지 안 갈 수 있었던 재판이 사형에 처해진지도 모른다.
감옥에서 뫼르소는 체코에 돈 벌러 갔다가 성공해서 돌아온 아들을 자신의 아들인지 모르고 죽인 엄마와 누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는다. 비극적인 이야기로 오이디푸스 신화가 떠올랐다. 의도치 않은 살인, 실수로 인한 살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재판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주인공이고 정작 자신은 소외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에 대한 반항일까? 뫼르소는 살인을 한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사형에 앞서 자신을 개종시키러 온 사제에게 폭발한다.
죽음에 대한 확신.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확신. 자신한테는 이것밖에 없으니, 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있다고,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고, 죽음이 진리이고, 죽음 후에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고,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 즉 죽음이 불어 올라오고 있다고 울부짖는다.
이방인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누구나 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숨기고 이방인이 아닌 것처럼 살아간다. 카뮈는 이 작품에서 이런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뫼르소는 대놓고 말한다. 이런 뫼르소를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자유로운 영혼이자 이방인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고, 의도치 않은 살인에도 사형에 처하는 재판, 이런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라고 물으며 죽음만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삶에 의미가 없다고 다른 이의 삶도 의미 없다고 말할 순 없다. 모든 삶의 끝이 죽음뿐이라고,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모든 사람의 삶에 의미 없다고 단정할 순 없다. 삶에 의미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없다면 만들면 된다. 우주 입장에서는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인간은 다르다. 룰루밀러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말했듯이 인간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은 우주적 관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