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무라카미 하루키
호접지몽,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인간의 뇌는 꿈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럼 꿈은 왜 꿀까?
하루키는 꿈을 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도시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벗어버린 진정한 나만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꿈은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것을 많이 가르쳐 주는 것’이라 말한다.
꿈은 내 마음속 비밀의 공간이다.
누구도 내 꿈을 엿볼 수 없다.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어릴 적 사귀던 소녀가 얘기하던 상상 속의 도시.
그 도시는 꿈의 도시이고 꿈을 읽으면서 산다.
자신의 본체는 그곳에 있고, 현재 자기는 그림자라고 말한다.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소녀.
주인공은 소녀가 그 도시로 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소녀를 찾기 위해 그 도시로 간다.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이 광경을 보게 되면 사람은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애써 눈을 감은 채, 있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살다가 한 번 보게 되면, 선을 넘게 되면,
다시는 그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꿈속의 내가 진짜 나이고,
현실의 나는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지만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인정하는 순간
난 꿈속으로 가던가, 현실에 남아야 한다.
그래서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나는 모호한 상태를 유지하며 가끔 소통할 뿐이다.
“이 도시는 완전하지 않아요. 벽 역시 완전하지 않고요.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것에나 반드시 약점이 있고, 이 도시의 약점 중 하나는 저 짐승들이에요.
그들을 아침저녁으로 출입시킴으로써 도시는 균형을 유지하죠.”
우리에게는 그 짐승이 의식과 기억이라고 하루키는 말하는 것 같다.
“의식이란 뇌의 물리적 상태를 뇌 자체가 자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이 정말 신기하다.
자신이 자신을 자각한다?
뇌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데,
생각하는 주체가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니.
눈은 외부를 보는 것이지,
눈 자신을 볼 수는 없다.
의식이란 것이 신비한 점은
눈이 스스로를 본다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꿈을 안 꾸는 듯,
진짜 나를 잃어버린 듯 살고 있지만.
간간히 의식과 기억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에게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일상적으로 혼재하고, 경계를 넘나 든다.
사실 그게 인간인데 인정을 안 하고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다.
“짐작건대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현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된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그중에 하나를 골라잡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다.
어쩌면 그냥 귀찮다.
그냥 모른 척하는 게 편하다.
하지만 한번 선을 넘으면
그럴 수 없다.
한번 상처 난 내 의식의 스크래치는 아물지 않는다.
하루키는 자신만 그럴 수 없다고 독자를 꼬신다.
다시 묻자.
내가 그림자로 사는 것인가?
그림자가 나로 사는 것인가?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내가 그림자로 살고 싶은가?
그림자가 나로 살고 싶은가?
문득, 의식이란
내가 그림자를 보거나
그림자가 나를 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