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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Feb 26. 2021

Picture of the Moon

정월 대보름 아침, 어젯밤 오곡밥 좀 드셨는지요? 어릴 땐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오곡에 버금가는 나물반찬 가득한 밥상을 여러 차례 어젯밤에 받곤 했습니다. 엄마는 연신 상을 내오시며 밥을 아홉 번 먹는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1년 중 명절, 생일 등 몇 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평소와는 다른 넘치는 밥상을 받곤 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잘 살지 못하고, 음식이 귀했기에 식탁의 균형이 맞지 않을 수밖에 없던 그때 그 시절이었습니다. 수출 100억 불, 국민소득 1,000불 달성을 국가 경제 목표로 하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날도 그런 특별한 날 중 하나였지요. 평소 갖고 싶은 물건을 힘 안 들이고 아무 조건 없이 정당하게 얻을 수 있는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특별히 그럴 이유가 없는 날이 되었지요. 우리 아이들이 1년 365일 어느 날이든 갖고 싶은 건 다 요구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풍요의 시대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소파 방정완 선생이 100여 년 이 땅에 어린이란 없던 말을 새로 만들고 어린이날을 제정했던 그 시절과는 판이하게 다른 21세기 대한민국입니다. 그분의 바람대로 어린이의 지위와 중요도는 커졌으며, 또한 그것이 일상화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5월 5일,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 아닌  1년 365일이 어린이날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린이날은 굳이 휴일로 둘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같은 의미의 이유라면 그 휴일을 3일 후 어버이날로 옮겨야 할 타당성이 더 커졌습니다. 대부분 가족들이 핵가족화 시대로 옛날과는 달리 부모님과 떨어져 사니 그날 하루만이라도 온전히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날을 휴일에서 빼자고 그 누군가 주장하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장하기엔 위험 부담이 큰 금기 사항 같은 것이니까요. 그리고 어버이날을 추가로 휴일로 지정하자고 주장하기에도 부담이 클 것입니다. 주 5일제 근무 이후 가뜩이나  지금도 휴일이 많다고 하니 말입니다.


전 그래도 어린이날 휴일 폐지, 어버이날 휴일 지정을 주장합니다. 고령화 시대로 가는 작금에, 아니 이미 고령화 사회가 된 지금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하루라도 덜 외로운 날을 보내실 수 있게 말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신 우리 부모님들이십니다. 오늘 아침도 통화 중에 어젯밤 오곡밥 챙겨 먹었냐고 묻는 엄마입니다. 그리고 주말에 와서 당신이 만들어놓은 무채와 시래기나물을 갖고 가라고 성화십니다. 하긴 엄마 눈엔 50대의 이 아들도 슬하의 어린이로 보일 것입니다.


" 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오늘 밤엔 남산뿐이 아닌 동산 서산 북산  이 동네 저 동네 모든 산 위보름달이 뜰 것입니다. 대보름이기에 그냥 보름달이 아닌 쟁반 같이 둥근 달입니다. 새벽엔 부럼을 깨서 먹었고 낮엔 겨우내 즐기며 날렸던 연을 날리며 일부러 줄을 끊어 연과 함께 새해의 액운도 하늘 저 멀리 미리 날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밤엔 훤한 대보름 아래에서 논둑이나 밭둑을 태우며 그 불을 깡통에 담아 빙빙 돌리며 보름달 마냥 둥근  원을 그려대는 쥐불놀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대학 가요제에서 옥슨 80 밴드가 "야! 불이 춤춘다.. 우리 소원 빌어봐" 하며 불러댔던 '불놀이야' 노래의 그 불놀이입니다. 새해 농사를 시작하기 전 풍년을 기원하던 놀이였습니다. 이런 놀이들은 제가 어렸을 때만에도 모두가 즐겼던 세시 풍속이었지만 지금은 몇몇 지자체의 민속 행사로 거행되는 특별한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달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예술의 장르를 막론하고 달과 관련한 많은 명작탄생시켰습니다. 특히 그 달이 꽉 차올라 둥근 보름달이 될 때엔 그들의 기운도 덩달아 차오른 듯합니다. 예술가의 가슴에 뜨는 달과 자연의 하늘에 뜨는 달, 이 두 개의 둥근 원이 드디어 하나로 딱 맞게 포개질 때 아티스트의 야상은 최고조에 달해 과연 멋진 걸작 탄생하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풍요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달이건만 그 달은 대개 슬프고 쓸쓸하게 노래되고 그려지곤 했습니다. 달이 음기를 상징해서 그랬을까요? 베토벤의 '월광', 드뷔시의 '달빛' 등 언뜻 떠오르는 달을 주제로 한 명곡들만 봐도 그러합니다.  금토끼 옥토끼 이야기로 한결같이 밝게 묘사되던 어린 시절 우리네 동요와 동화 속에 등장하던 달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정월 대보름달 아래에서 축제성 놀이를 즐겼던 우리 세시풍속  분위기와도 사뭇 다릅니다. 그리고 이태백이 놀던 동정호의 달이든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노래한 경포호의 달을 보더라도 풍류와 해학이 어린 동양의 달은 서양의 달과정서가 달라 보입니다.

이런 달에 대한 서정성 가득한 팝송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2011년 타계한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의 'Picture of the Moon'입니다. 이 곡은 그의 대다수 곡들이 그러하듯 템포 느린 블루스 풍으가듯 멈추듯 가듯 전개됩니다. 마치 하늘 위 달이 멈춘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다시 보면 움직여 있듯이 천천히 둥실둥실 노래는 그렇게 그의 기타와 함께 흘러흘러 떠서 갑니다.


그렇지만 그가 그의 기타 현을 뜯을 때마다 뚝뚝 묻어 튀어나오는 소리는 남의 애를 끊을 듯 절절하기만 합니다. 중간부 기타 솔로가 고음으로 치달을 때에는 하늘 위 달도 그에 맞춰 더 높이 높이 솟아 올라가는 것만 같습니다. 게리 무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아티스트라 그게 가능한 것이겠지요. 듣다 보면 그가 울고, 그의 기타도 울고, 종국에는 하늘에 떠있는 달까지 우는 듯합니다. Moon Elegy..



달 하니까 떠오르는 그림도 있습니다. 바로 존 엣킨슨 그림쇼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화가입니다. 하도 달을 많이 그려대어 달빛 화가라 불리는 미술사의 거장입니다. 그의 그림들 말 그대로 picture of the moon입니다. 상단의 그림 저 멀리 빅벤 시계가 보이는 걸 보니 지금 이 달은 런던 테임즈강 위에 떠있습니다. 당최 그의 그림에선 푸른 녹음과 밝은 빛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봄여름가을은 쉬고 겨울에만, 그것도 낮엔 쉬고 밤에만 그림을 그렸나 봅니다. 하단 그림도 추워 보이는 겨울 앙상한 마른 가지 위 잿빛 하늘에 희미한 달 하나 덩그렁 매달려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산업화 초기에 지치고 찌든 도시의 모습을 어슴프레 밝히는 그런 달일 것입니다.

정월 대보름이라 시작한 달 이야기는 저 하늘에서  마음으로 내려와 게리 무어의 노래와 그림쇼의  그림까지 움직여 갔습니다. 동그란 달이 굴렁쇠처럼 떼구루루 굴러가듯 말입니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   빈 하늘 달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밤, 남겨진 나 홀로 쓸쓸하고 처연하기 그지없는 밤일 것입니다.


"I was left with a picture of the moon.
All that's left is a picture of the moon."


어쩌면 게리 무어의 picture of the moon은 그림쇼의 그림 속에 떠있는 바로 그 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오늘 밤 뜨는 쟁반 같이 둥근 우리의 달은 그런 그들의 달과는 다를 것입니다. 


Happy the First Full Moon!



https://youtu.be/UjUpRKjO5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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