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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Mar 17. 2021

미안해요.. 미나리

제 어린 시절 한편에 미나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멈춰진 한 장면입니다. 어린 시절 기억 중에 딱히 기억할만한 스토리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또는 그 사건이 당시 뇌에 충격을 줄 만한 놀라운 이 아님에도 평생을 따라다니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중 어떤 장면은 진짜 그 일이 가 겪은 일이 맞나 할 정도의 기시감을 느끼게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기억 속 미나리 그 모습은 글을 쳐내려 가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예기치 않게 본 영화 '미나리'에서 윤여정 할머니가 심어놓은 개울가의 그 미나리와 오버랩이 되어서 그 기억은 더욱 생생해졌습니다.


정확한 시점까지는 생각 안 나는 미나리의 첫 경험은 초등학교 저학년 이하 때일 것입니다. 일단 떠오르는 그 장면 속에 초가지붕도 등장하니 말입니다. 당시 저희 할머니 댁은 지금은 안산 도시로 크게 변모한 경기도 시흥군의 싯굴이라 불리는 시골 동네에 있었는데 그 집이 번듯한 양옥으로 개조된 것은 새마을운동 후였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그 운동이 불같이 일어나 헌마을이 새마을이 되었으니 당시 제 나이를 고려하면 그쯤이 맞을 것입니다. 통상 시골 옛집이 그러하듯 두엄 저장소를 겸한 뒷간이라 불리는 화장실은 본채 밖에 따로 두었는데 그 화장실로 이어지는 고 짧은 길 옆에 제 기억 속의 미나리밭이 위치합니다. 말이 밭이지 물이 있어 아주 조그만 논처럼 보였습니다.



호기심 많았던 저는 우리 할머니를 통해 그 식물이 제가 기억하고 있는 미나리라는 대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지저분하게 노출된 푸세식 뒷간 바로 옆에 먹는 채소를.. 애기 때부터 한 깔끔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한 불일치성으로 인해 지금까지 어린아이의 기억치곤 흔치 않은 미나리가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나리는 지저분한 물을 정화시켜주고 사람의 피를 맑게 해주는 깨끗함의 대명사인 채소입니다. 또한 복어를 먹으며 알게 된 것은 미나리가 복어에 있는 독성을 중화시켜줘서 함께 먹는다는 입니다. 그리고  이런 미나리가 아무 데에서도 잘 자란다는 것은 이번 영화 미나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미나리는 영화 속 윤여정 씨의 대사처럼 원더 풀이라 하겠습니다.


미나리가 원더 인 것처럼 미나리는 원더풀한 영화입니다. 일단 저의 기대를 한참 뛰어 넘어섰습니다. 지난 주말 처가 부모님과 점심 식사 중 장모님께서 급 제안하셔서 식사 중 앱으로 예약하여 동네 극장에서 번개로 본 영화입니다. 만약 그때 장모님께서 제안하시지 않았으면 전 아직까지 미나리의 실체를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영화를 언젠가는 보긴 봐야지 하며 마음은 먹고 있던 터라 계속해서 적당한 D 데이를 느리게 느리게 미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확 당기는 영화는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며 사전 예매까지 하며 개봉 당일 한달음에 극장까지 달려가서 봤던 이 전의 수작 영화들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나마 보긴 봐야지 했던 것은 어느 날부터 뉴스에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이름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와서였습니다. 꼬리를 무는 수상 뉴스들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영화의 제목이 미나리라는 사실도 뉴스에 잘 안 나온 건지, 아님 잘 안 들린 건지 암튼 상 받았다고 하는 그 영화에 대한 정보는 제목조차 불투명했습니다. 그런데 윤여정 씨의 수상 횟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영화가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작비가 2백만 불짜리 영화라는데 작품성이 뛰어난 뭔가의 실험성이 강한 독립 영화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제목도 특이하고.. 재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시간 봐서 한 번 보긴 봐야겠구나라는 생각의 프로세스까지 오던 터에 그 영화를 급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와우, 원더풀!이란 함성이 안에서터졌습니다.    



미나리는 졸리려면 무지하게 졸릴 수 있는 영화지만 관객을 졸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 졸음이 와도 졸음과의 싸움에서 호락호락 지기 힘든 영화입니다. 느려 터진 영화임에도 말입니다. 당시 점심 식사 후 바로 본 영화임에도 제가 한 번도 졸지 않았음에 전 이렇게 객관화를 시켜봅니다.


영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게 처음부터 끝까지 아칸소의 푸른 농장과 주인공 가족의 집을 교대로 보여줍니다. 그것도 일정한 템포로 느리게 느리게, 음악으로 치면 아다지오 정도의 속도로 거의 변화 없이 끝까지 흘러가듯 갑니다. 딱 한 장면을 빼곤 그렇습니다. 출연 배우라 봤자 주인공 가족 이외에 몇 명 나오지도 않습니다. 더 많고 화려한 장면을 보여주기엔, 그리고 더 많은 배우들을 출연시키기에는 제작비 2백만 불의 한계로는 어려움이 있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미나리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연출한 정이삭 감독의 머릿속에 더 많은 제작비는 애당초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 간 인간들의 미묘한 감정선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부인과 남편,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 할머니와 손자 등 그들 사이에 발생하는 에피소드에 연출자는 각각 구성원의 심리 상태를 최대한 끌어내어 표현하게 지만 그것이 전혀 오버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으로 관객의 일상에 박히게 합니다.


압권은 부인으로 출연한 한예리 씨의 감정 폭발이었습니다. 남편 역의 스티븐연 씨가 절치부심 끝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근접하고, 내내 따라다녔던 가족 구성원의 우환이 제거되어 마땅한 평화가 확인된 순간 그녀는 영화 중 가장 격하게 폭발하며 남편에게 울며 항의합니다. 다행이다 싶어 안도하던 관객에겐 다소 의외의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인간에겐 그런 면이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이란 때론 액면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함을 느끼게도 하니까요. 역설과 아이러니 같은 것들그것이지요. 상세히 상황을 기술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요기까지만 기술하겠습니다. 아무튼 반전 아닌 반전인 그 장면은 제가 영화 미나리를 보면서 최고로 꼽은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유머도 왕왕 등장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도 왠지 이 영화엔 이런 극적인 반전이 있을 것이라곤 예상하기 힘들었는데 그 반전이 나옵니다. 그것도 크기가 큰 반전입니다. 위에 기술한 유일하게 딱 한 군데, 템포가 아다지오에서 프레스토로 빨라지는 한 장면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유머는 미국에 힘들게 뿌리내리는 한국 이민 가족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 시놉시스를 봐도 그렇고 메가폰을 잡은 정이삭 감독의 모습이나 인터뷰를 봐도 진지함만이 배어있어 생각하기 힘든 요소이지만 예상외로 재미있는 유머들이 왕왕 등장합니다. 재미있는 할머니가 오신 다음부터 아연 활기를 는 것이지요. 반전과 유머, 이렇게 영화적인 재미도 있는 미나리입니다.


영화관을 나서며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였습니다. 오랜 시간 빈 배, 빈 손으로 공치다가 엄청나게 큰 청새치를 발견한 노인이 3일간 사투를 벌인 후 결국은 이겨 그것을 포획하게 되지만 상어 떼를 만나 그 수확물을 잃게 되는 그 소설 말입니다. 청새치의 그 풍성한 살들은 사라지고 말 그대로 뼈만 남았습니다. 얼마나 속절없고 허무한 인생입니까?


제가 이 명작을 떠올린 것은 미나리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티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나리는 다릅니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아니 달려가기까지 하는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미나리는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영화에서 못 본 완벽한 해피 엔딩은 영화가 끝나고 1년 후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땐 남편 스티븐연 씨에게 울며 거세게 항의했던 부인 한예리 씨도 환하게 웃으며 기뻐할 것입니다.


어제 미나리는 아카데미에 무려 6개의 상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최종 수상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된 윤여정 씨 말대로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상 탄 것과 같은 매우 기쁜 뉴스입니다.  과연 원더풀한 미나리입니다. 상을 받는다고 해서 제가 이렇게 찬사를 보낸다면 그것은 영화 속 제가 최고의 장면으로 뽑은 한예리 씨의 열폭과 같은 감정 공격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미나리를 몰라 보고 제가 홀대했다니요! 하하.. 사과드립니다. 미안해요.. 미나리.



(그로부터 한 달 후 미나리는 영화 최고의 영예 아카데미에서 이견 없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와우, 또 원더풀! 아울러 저는 휴우~.. 때라도 미리 미안해했길 다행입니다. 윤여정씨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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