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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Nov 13. 2021

낙엽을 찍으면서 - 2

아래 글은 지난 월요일인 11월 8일에 쓴 '낙엽을 찍으면서'의 두 번째 버전입니다. 두 글은 전반부는 같으나 후반부는 다릅니다. 같은 제목의 첫 번째 글엔 중반부 이후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등장했습니다. 그날이 워낙 유별나서 쓰다가 두 가지 단상으로 갈라졌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낙엽 수북한 로버트 프로스트가 걸었던 숲속의 노란 두 갈래 길을 다 가게 된 셈입니다.


월요일은 일기예보가 맞지 않기를 바라던 날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추운 건 점점 참기 힘든데 기상청에서 때 아닌 추위가 온다고 해서 그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보가 딱 들어맞은 그날은 급 추위에 비와 바람까지 맹렬하게 초목과 대지를 때려댔습니다. 전날인 일요일은 인디언 썸머를 방불케 할 정도로 한낮엔 땀까지 몸에 배었는데 말입니다. 하루 사이로 여름에서 겨울이 되었습니다.


겨울이 길어지는 건가요? 아님 이상 기온인가요? 같은 시간 베이징엔 눈까지 왔습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간 순간 전날과는 다른 가을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세찬 비바람에 맞서서 휘어진 우산을 방패 삼아 힘겹게 전진하느라 숙여진 머리 아래로 길바닥만 주로 봤음에도 어제완 다른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요. 지전 같은 낙엽이 지천으로 깔려있던 것입니다.


환경미화원님들의 새벽 수고로 늘 깨끗했던 우리집 앞 길이 상전벽해가 아닌 알록달록 낙엽벽해로 바뀌었습니다. 낙엽이 너무 많아 평소의 작업 도구로는 엄두가 안나 그냥 방치한 듯싶습니다. 비도 여전히 오고 있고요. 제겐 그래도 쌓인 낙엽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쯤은 한껏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니 궂은 날씨임에도 오히려 좋은 듯싶었습니다.


보랏빛 포도 위 비에 젖은 낙엽

월요일 양재천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핸드폰으로 찍은 보랏빛 포도를 가린 무성한 낙엽들입니다. 그들은 난데없는 비바람에 무자비하게 목들이 잘려나갔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추풍낙엽입니다. 어제까지는 공활한 하늘, 더운 태양 아래 따사로운 볕을 쬐며 튼튼하게 매달려 있던 그들인데 말입니다. 인간 팔자, 아니 잎새 팔자 알 수 없습니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 더 이상 쓸모없기에 낙엽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쓸쓸한 '추일서정(秋日抒情)'이 흐르는 딱 그런 날이었습니다.


가을은 다른 계절에 비해 가장 짧음에도 세 번이나 옷을 갈아 입어 다양한 패션을 연출합니다. 그래서 다른 계절은 갖고 있지 못한 초추, 중추, 만추란 이름으로 기승전결과 같은 그의 생을 보여줍니다. 바로 전까지 단풍으로 가장 화려하게 타올랐던 잎새들은 이제 추락한 낙엽이 되어 바닥에 바짝 몸을 낮추고 있습니다. 젖어서인가 그 꼴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화무십일홍인가요? 이제 그들은 쓸려지고 태워지고 그리고 묻히겠지요. 1세기 전 우리의 어느 위대한 문학가가 같은 초식으로 낙엽을 대했듯 말입니다.


만추의 앙재천 숲길

지난 9월엔 메밀꽃이 화려하게 피었습니다. 그 문학 작가의 고향 마을 봉평은 마을 전체에 소금을 뿌린 듯 하얀 메밀꽃으로 덮여있었습니다. 그 안엔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사연도 덮여 있었나 봅니다. 여름을 끝낸 가을이 해가 오르듯 중추를 향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메밀꽃 필 무렵' 가을을 여는 소설을 썼던 작가는 가을이 끝나갈 무렵엔 '낙엽을 태우면서' 수필을 씁니다. 그런데 그새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토속적이고 전원적이던 메밀꽃에서 감상적이고 트렌디한 낙엽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소재가 낙엽이라 하니 다분히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낙엽 하면 응당 김광균 시인의 추일서정처럼 쓸쓸하고 처연해야 할 듯싶은데 낙엽을 태우면서 그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태울 땐 눈을 자극하는 자욱한 연기와 함께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 노동도 역시 또 그에겐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작가는 때론 범부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니까요. 위의 환경미화원님이 바라보는 낙엽과 작가가 바라보는 낙엽은 다를 것입니다.


이효석, 그때 그가 낙엽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때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그의 수필에 등장하는 오브제 어휘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커피, 백화점, 침대, 목욕실, 스키, 크리스마스트리, 색전등.. 그가 선택하고 사랑한 이런 것들이 그 시대 국의 사용용품이라고는 당최 여겨지지 않습니다. 글의 내용 중 전차만 지하철로 바꾸면 그의 이 수필은 100년 후 이 시대에 쓰인 것이라 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백화점에서 산 커피의 향을 맡으며 전차를 타고 집에 온다"에서 교통수단인 전차를 지하철로 바꾸면 100년 후의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시대를 앞서간 모던 보이 이효석!


이효석님은 한일합병 3년 전인 1907년에 태어나 광복해방 3년 전인 1942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시절 불과 35년밖에 살지 못한 그가 누린 것들이라곤 너무나 호사스럽습니다. 세상 어느 왕족이나 귀족이 부럽지 않은 그처럼 보입니다. 수필에서 그는 이러한 신식(?) 것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구라파 서구 사회를 동경하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낙엽을 태우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세련되고 단아한 모던보이 작가 이효석(李孝石), 1907~1942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면서 그 냄새가 좋다고 얘기합니다. 얼마나 좋으냐면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고 하며 한술 더 떠 그것에서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개암은 헤이즐넛입니다. 와우, 우리가 흔히 다방 커피라 불렀던 요즘의 믹스 커피에서 벗어난 지가 불과 21세기의 시작과 함께였는데 그는 100년 전 20세기 초에 이미 바리스타가 갓 볶아낸 것과 같은 헤이즐넛 커피를 즐긴 것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마시고 싶다고 안성기 씨가 외친 동서식품의 프림 커피에서 벗어나 원두커피로 우리의 커피 문화를 결정적으로 바꾼 스타벅스는 1999년이 돼서야 이 땅에 들어왔는데 말입니다.


그리곤 그가 좋아하는 커피를 떠올려 선가 그는 불현듯 타는 낙엽에서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낀다고 얘기합니다. 낙엽을 태우고서 할 일을 다했다 싶어선인지 다른 삶이 있는 세계로 넘어온 것입니다. 화려했던 초록의 기억이 사라진 타버린 낙엽 재를 가리키면서는 죽어버린 꿈의 시체라 했습니다. 사람들이 장사를 마치면 가버린 사람은 잊고 남은 자들이 새 삶을 시작하듯 이효석 그도 그런 것입니다. 그리곤 불에 타는 낙엽의 연기와도 같은 목욕물 위에 피어오르는 김 아래로 그의 전신을 담그면 마치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기듯 천국 같은 느낌에 빠진다고 하였습니다. 지상 천국이 별개 아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뜨거운 불에서 시작해 뜨거운 물로 이동한 낙엽을 태우는 의식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불에 자기 몸을 태워 다시 젊어지는 불사조 피닉스처럼 낙엽을 태운 그는 다시 소년이 된 듯 용감해집니다. 그리고는 백화점에 가서 찧은 커피를 사 오고 집에 와선 바로 닥칠 겨울에 장식할 크리스마스트리와 즐길 스키를 생각하며 즐거움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도 글을 쓰는 생활인인지라 책상에 붙어 원고지를 앞에 두고서는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합니다. 작가의 숙명인 창작의 고통이겠지요. 그러면서 별거 아닌 낙엽을 태우는 일상의 일에서 창조적인 뜻을 발견함에 신기해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이 준 혜택 아닌 혜택이라 생각하며 말입니다. 달리 수확과 결실의 계절이 아닐 것입니다.


양재도서관 3층 카페 좌석


오늘, 가을이 가기 전 이효석 님의 짧은 수필인 '낙엽을 태우면서'를 다시 또 읽기를 권고드립니다. 작년 가을에 읽었다 해도 한 해가 지난 만큼 우리는 또 그만큼 성장하고 깊어져 그 맛이 다를 것입니다. 아마 작가처럼 1년 전엔 보이지 않던 일상 속에서의 창조적인 어떤 것이 떠오를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행복한 상상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저는 그러네요. 일단 낙엽이 연결해준 이효석 님의 글로 인해 생각지 않은 두 번째 낙엽 글을 쓰고 있으며 지금 제 앞의 커피는 낙엽을 태우지 않고 찍기만 했음에도 어제와는 다른 맛으로 저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목요일 정오, 방금 양재도서관 창밖으로 그간 3일간 궂었던 하늘이 열리며 햇살이 안으로 성큼 들어왔네요. 지난 월요일 빗속에서 우산을 턱에 괴고 낙엽을 찍었듯 자리에서 후딱 일어나 핸드폰 카메라를 또 찰칵거립니다. 작은 행복의 이어짐입니다. 이제 글을 마치면 저도 생각할 것입니다. 올 겨울엔 무엇을 할까 하고 말입니다. 근데 그간은 무심코 모르고 마시곤 했던 이곳 구내 커피숍 상호가 '늘봄'이었네요. 이효석 님이 그렸던 화려한 초록의 기억이 늘 살아있을 것만 같은 늘봄..


만추의 햇살이 길게 드리운 양재도서관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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