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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l 31. 2022

날개. 버팀의 힘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11

전망대. 어느 도시나 있는 곳.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 다 좋은데 꼭 높이 올라야 한다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는 곳. 짝꿍과 나는 그런 전망대, 속초등대전망대에 오르기로 했다. 전망대에 엘리베이터 정도는 하나 있어도 좋지 않을까. 분명 끝이 있겠지만 아래에서 보기에는 절대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의 첫 번째 계단 위에 발을 살포시 올려놓고 올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내가 또 언제 여기 오겠어? 여기까지 온 게 아깝잖아.'라는 내적 외침이 들려왔다. 이 내적 외침으로 인해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동아리 모꼬지로 지리산을 갔을 때 천왕봉까지 정복하고야 말았었다. 비와 안개를 뚫어가면서. 이 몹씁 나의 내적 외침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들려왔고 내 무릎은 이미 수없이 구부러지고 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중간에 내려가는 건 성격상 정말로 어렵다. 그래서 나는 선택을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 거의 대부분 직진이다. 그 덕분에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할 일도 많아지니 꼭 융통성이 없다느니 저지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라느니와 같은 조언 비슷한 지적질에도 꿋꿋하게 잘 버티고 있다. 아니 버티려 노력한다.


헉헉대며 짝꿍과 함께 계단을 오르고 쉬기를 반복하며 전망대 입구까지 올랐다. 우리를 반기는 건 짙푸른 바다보다 먼저 뺨을 때리는 바람이었다. 바람을 들이키며 잠시 정신을 차리고 진정한 목표점인 전망대 꼭대기에 오를 차례였다. 그런데 우린 코로나에게 발목을 잡혀 버리고 말았다. 코로나 시국이라 전망대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굳게, 꽁꽁 닫혀있었던 것이다. 허탈한 마음에 짝꿍과 나는 한참을 서로 멀뚱히 쳐다 보며 귀찮게 하는 바람만 하염없이 맞고 서 있었다. 그러다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날개'였다. 보통 관광지에 가면 벽화로 그려진 날개 앞에서 사람들이 천사가 된 마냥 사진을 찍는데 여긴 날개가 조형물로 되어 있었다. 반가웠다. 그런데 전망대의 날개 작품 때문인지 과거 사진으로 봤던 그 날개 작품 때문인지 머릿속에 잠시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사진으로 봤던 그 날개는 [예술가의 방]이라는 책에 실린 예술가 윤석남의 작품이었다. 윤석남. 그 이름과 작품을 기억하는 건 어느 순간 나의 세계와 맞닿아 공명하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석남의 삶을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늘어놓는다면 흔하디 흔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돈이 없어 그림과 학교를 포기하였으며 적당히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던 중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 미술을 접하고 조각을 접하며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비극과 희극을 동시에 보여주는 성장 드라마 속 주인공과 꼭 닮은 인생을 살았다. 물론 인생은 객관적일 수 없어 그 거쳐온 삶의 과정은 결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 덕에 윤석남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그리고 타의에 의해 나를 잊고 사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알고 있어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을 대변하는 작품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꽉 눌려져 있었던 에너지. 그 응축력이 뒤늦게 다시 시작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꿋꿋이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와 맞닿은 부분은 '나를 잊고 사는 삶'이었다. 그 책을 읽으며 윤석남이라는 예술가를 만날 즈음이 내가 첫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며 일도 동시에 하던 내 인생의 가장 암흑기였다. 물론 내가 좋아 아이를 낳았고 내가 좋아 하는 일이었지만 육아도 살림도 일도 뭐 하나 온전히 제대로 해 내는 것이 없던 때였다. 하고 싶은 방향으로 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방향을 선택해야 했던 날들이었고 날마다 쫓기듯 여유가 없던 때였다. 그때의 답답함과 갑갑함이란 온몸에 허~연 가스가 꽉 차 있어 언제고 터져 날 산산이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 뒤죽박죽이었던 때였다. 그때 보았던 그 책 속의 날개는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한쪽밖에 없어 온전히 날 수 없고, 그래도 날고 싶어 뻗치다 보니 길이만 길어진, 그래서 너무 무거워져 지탱하고 있는 것조차 힘들지만 끝까지 버티는 듯한 모습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눈에 콕 박힌 그 날개를 책장 속에 꽂아 놓고 오랫동안 계속 꺼내 보았다. 날개의 힘을 받아 버티고 버텨 무사히 첫 아이를 잘 키워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그 해 난 둘째를 낳았다. 너무 잘 버텼나 보다.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인데 이렇게 빛의 속도로 내 앞에 날개의 기억을 가져다 놓는 나의 무의식은 참으로 빠르고 대단하다. 나의 무의식도 주인을 닮아 직진인가 보다. 가끔 나쁜 기억을 원치 않는 때에 대령하기도 해 날 곤혹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나를 버티게 해 준, 무사히 생존할 수 있게 해 준 고맙고 의지가 되었던 기억을 알아서 떡~ 하니 대령할 때는 참 고맙기도 하다.


속초등대전망대에 있는 날개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고 바람의 길도 동그랗게 나 있어 절대로 어떤 외부의 힘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드는 건 양쪽 날개가 모두 있어 날 수 있다는 것, 발돋움만 하면 언제든 날아갈 수 있는 준비 완료의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런 믿음직스럽고 만족스러운 날개 앞에서 낭만이라고는 1도 없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하늘로 하늘로 날아가는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짝꿍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버팀의 힘을 준 날개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전망대 꼭대기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전망대 꼭대기에서 보는 풍경도 지금과 같을 거라며 짝꿍과 나는 서로에게 억지 위로를 하고 '아닐지도. 더 멋질지도.'라고 외치는 내 마음을 설득하며 전망대 언저리에서 만난 날개, 짙푸른 바다, 세찬 바람에게 고마움과 반가움을 전했다. 그리고 나와 짝꿍은 분명 끝이 있는 계단을 내려가기로 했다. 늘 올라가는 것이 중요했는데 어느 순간 잘 올라가는 것만큼 잘 내려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만큼 내려갈 일이 많아지는 나이가 다가오는 걸까. 아직은 높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큰데. 인생길은 조금 더 올라가는 걸로 하고 오늘은 이만 짝꿍과 오손도손 이 계단을 조심히 잘 내려가 보려 한다. 




  #날개 #속초 #전망대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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