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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l 26. 2022

소주 말고 쏘주. 투명한 샘물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9

자작나무도 보고 솟대로 보고 황태구이도 먹고. 인제는 반가움을 만나는 곳이었다. 그리고 포근하고 맛난 맛으로 기억될 곳이었다. 자작나무와 솟대와 황태구이를 뒤로 하고 짝꿍과 나는 속초로 향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속초를 떠올리면 밤새 소리가 고즈넉하게 울리는 어두운 밤하늘과 숲, 집집마다의 작고 희미한 불빛이 생각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 있나 보다. 


짝꿍과 나는 해 질 녘 속초에 도착했다. 대명항 근처 라마다 호텔에 캐리어를 두고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하였다. 라마다 호텔을 숙소로 정한 건 순전히 '바다 뷰'때문이었다. 내가 호텔을 선택하는 기준은 침대에 누웠을 때 바다가 보이느냐이다. 딱 하나뿐인 조건인데 그리 쉽지 않은 조건인지 내 짝꿍은 여행을 갈 때마다 호텔을 선택하는 것에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이번에도 짝꿍의 기막힌 써치 능력으로 침대에 누워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


호텔 근처라 역시 먹거리가 많았다. 불빛이 번쩍이고 커다란 꽃게가 떡~하니 붙어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바다 앞이니 당연히 회를 주문하고 회의 첨가물, 소주를 주문했다. 어쩌면 소주의 첨가물이 회 일지도... 나는 여행을 할 때마다 그 지역의 소주를 찾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소주보다는 쏘주를 찾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소주는 고려 충렬왕 때 몽고군을 통해 처음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그때는 백성들이 마시는 술이 아니라 왕이나 사대부들이 마셨고, 단순히 술의 의미보다는 약술의 의미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쉽게 마실 수 있는 술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주는 원래 쌀을 원료로 한 증류주였으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등을 걸치며 부족한 쌀 대신에 감자, 밀, 보리, 고구마 등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요즘 흔히 마시는 대부분의 소주는 95%의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넣어 묽게 만든 희석식인데 이는 1965년 정부가 식량 확보와 국민 경제 안정을 목적으로 양곡을 관리 비축하는 '양곡관리법'을 시행하면서 부터 소주의 제조 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증류식 소주가 원래는 기본형이었으나 희석식 소주가 많이 보급되면서 오히려 증류식 소주가 전통 소주로 분류되었다고 하니 아이러니하다.


증류주이건 희석주이건 소주는 '국민 술'임이 분명하다. 많이 알려진 지역의 소주로는 서울 경기의 참이슬, 강원도의 처음처럼, 충청북도의 시원한 청풍, 대전 충청남도의 이제우린, 대구 경북의 맛있는 참, 부산의 시원과 대선, 경상남도의 좋은데이, 전라북도의 하이트, 전라남도의 잎새주와 천년애, 제주의 한라산과 올래 등이 있고 그 외에도 일품, 원, 서울의 밤, 동해, 맑은 강원, 백화, 첨내린담금주, 토끼소주, 명랑스컬, 화요17, 한산소곡주, 진도홍주, 문배주, 강릉소주, 안동소주 등등 우리가 모르는 그 지역 사람만이 아는 특색 있는 소주가 정말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지역의 소주를 찾아 마시길 좋아한다고 해도 사실 처음에 병을 딸 때 코끝에 느껴지는 향이 조금 다름을 느끼지만 마시다 보면 술맛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는 못한다. 취하면 다 똑같으므로. 그러나 꼭 그 지역의 소주를 찾는 이유는 호기심이다. '옆 집은 무슨 반찬으로 밥을 먹나?' 하는 주부로서 엄마로서의 궁금증이 여행지에서는 '여기 사람들은 무슨 술로 회를 먹나?'라는 호기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녀석들은 '바다한잔 동해'와 '맑은 강원'이었다. 뭘 알고 찾은건 아니고 식당 술 냉장고에 가득히 들어 있었다. '여긴 이거 마셔요.'라고 말하듯이. 바다한잔 동해에는 동해답게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맑은 강원은 강원답게 푸른 산이 그려져 있다. 지역 소주는 그 지역의 특징을 병 디자인에서부터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참 좋다. 어떤 녀석을 먼저 마셔볼까 고민하다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를 먼저 선택하였다. 병에 그려진 넘실대는 파도가 술잔에서 넘실대는 소주 같아 보여 먼저 선택한 것일 뿐이니 맑은 강원은 선택을 새치기 당해 속상해하지 말길...


'따라락 휙휙휙'

'띵'

'겅겅겅겅쪼르르륵~'

'띵'

'겅겅겅겅쪼르르륵~'

'째~앵~'

'사랑합니다.'

'꼴~깍'


역시 이 맛이야. 한 번에 털어 넣는 깔끔한 맛. 짜릿하게 퍼지는 알코올 향과 뒤이어 퍼지는 단맛. 역시 오늘 저녁의 주인공은 소주. 회는 소주의 첨가물일 뿐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 술을 좀 잘 아는가 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냥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즐겁게 마실 뿐. 물론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맛보고 빈 병으로 두른 소박한 나만의 바를 가지고 싶긴 하다. 예전에는 집을 지으면 가장 해가 잘 들고 아름다운 곳에 서재를 꾸미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은 가장 아름다운 곳에 바를 꾸미고 싶다. 책은 식탁에서도 침대에서도 소파에서도 차에서도,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데 술은 그렇지 못하니까. 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친구가 필요하고, 책과 같은 고체가 아니라 흐르는 액체라 앉아서 마셔야 하고, 그냥 마시기보다는 여러 가지 예쁘고 맛난 첨가물들이 필요하고, 가끔은 세상이 즐겁게 빙글빙글 돌기도 하니 말이다. 참 번거롭고 귀찮은 녀석 같지만 꽤나 매력적인 녀석이다. 


소주는 늘 친숙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마시고 아버지가 마시고 어머니는 무지하게 싫어하였다. 좀 더 자랐을 때는 내가 친구랑 마시고 짝꿍이랑 마시고, 이제는 내 딸과도 마신다. 코로나가 우리 삶을 훼방 놓기 시작한 2022년 2월 부터 나는 짝꿍과 집에서 술을 마셨다. 술집에 갈 수 없으니까. 식탁용 그릴을 2번이나 바꿀 정도로 굽고 또 마셨다. 그 시간 동안 대화는 많아졌고 짝꿍과 아이들과의 유대감도 더 좋아졌다. 그리고 화들짝 놀랄만한 변화도 생겼다. 의학 드라마를 보면 '90에 60. 혈압 떨어집니다. 위험합니다.'라는 대사를 수도 없이 듣는데 늘 그 위험한 상태인 채로 살아온 나였다. 그런데 소주가 고맙게도 나의 저혈압을 정상혈압으로 만들어 놓았다. 기분을 좋게도 스트레스를 날리게도 그러나 암흑 속에 빠뜨려 흑역사를 쓰게 하기도 하는 두 얼굴을 가진 소주라 곧 나를 고혈압의 길로 인도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멀리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친구다.


나의 아버지는 소주를 좋아했다. 좋아해서 좋아한 건지 필요해서 늘 가까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함께했다. '캬~~~'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끓인 동태탕을 먹으며 '시원~하다. 피로가 풀리네.'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 어린 날 나는 뭐가 시원한지, 피로가 뭐 때문에 풀리는지 몰랐지만 술이 참 신기하긴 하였다. 지금 아버지를 떠올리면 소주가 많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7남매의 장남이었다. 아기 때부터 가난한 건 아니었으나 극심한 가난에 내몰렸고 자기 자식만큼은 가난을 모르게 키우고 싶었다고 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바람대로 사업은 잘 되었고 나와 내 동생들은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라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IMF가 터졌고 난 그때 처음으로 소주를 마시며 우는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할 말이 있다고 나를 불렀지만 난 아버지에게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위기감을 느꼈고 두려웠다. 사업이 망하는 것보다 아버지가 망할까 봐 더 두려웠다. 돌이켜 보면 그 날 우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이 아프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은 참으로 많다. 사진으로, 음악으로, 향기로, 소리로. 그리고 소주로. 소주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다한잔 동해와 맑은 강원을 여러 병 샀다. 그리고 속초라고 적힌 예쁜 소주잔도 같이 샀다. 이제는 바다한잔 동해와 맑은 강원으로 아버지를 떠올리고 예쁜 속초 소주잔 안에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빠뜨려보려 한다. 오늘은 또 어떤 예쁘고 맛난 첨가물과 함께 할까 행복한 고민을 시작하련다.



#소주 #맑은강원 #바다한잔동해 #강원도 #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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