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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l 30. 2022

서점의 기억. 책, 사람 그리고 공간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10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또 사람을 만들고. 뫼비우스의 띠 같다. 중학교 수학 시간 칠판에 빼곡히 적힌 숫자와 기호들, 도통 이해도 안 되고 혹여 이해가 되면 뭐 하나 싶은 내용들로 한가득이었다. 그 많은 내용 중 하나 건져 올린 것이 뫼비우스의 띠였다. 뫼비우스의 띠를 어디에 쓰는지, 무엇을 증명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으나 신기하게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유한한 무한함의 느낌으로 내게 남아 있다. 신비롭다는 말이 딱 맞다. 이런 연속 선상에 있는 것이 책과 사람인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만드는.


여행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예전 나의 아버지가 알려주었다. 나도 무척이나 여행을 좋아한다. 일상에서 벗어나 마치 중력을 잊은 듯 공중에 유영하듯 다니는 것. 자유롭고 여유롭고 푸근해지는 것.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를 나만의 방법으로 즐기는 것. 그중 하나가 바로 책들의 임시 보금자리 '서점'구경이다. 지역 소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호기심. '이곳 사람들은 뭘 읽나?' 하는 호기심. 물론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책을 살 수 있고 지역 서점에만 특별히 있는 책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난 그냥 롯데마트나 홈플러스와 같은 대형 마트보다 작은 동네 채소가게와 과일가게를 더 좋아하는 것과 같다. 뭔가 좀 더 아늑하고 편안한, 그곳만의 독특한 느낌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속초에 자리 잡은 '문우당서림(文友堂書林)'이라는 서점을 방문하였다. 문우당서림은 '책과 사람과 공간이 어우러지는 책의 숲'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첫 시작은 1984년 5평 남짓한 공간의 동네 책방이었다고 한다. 단순한 책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영감을 전달하는 공간으로의 역할을 하길 바라는 소망을 담아 2002년 지금 위치한 곳에 건물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속초의 지역 서점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문우당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문우당 공간을 먼저 보게 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벽면 가득 채운 네모난 틀 속의 글귀들이었다. 그 글귀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짝꿍을 재촉해 어느새 문우당 앞에 나는 서 있었다. 문우당 로고가 보이는 짙은 회색 건물, 뭔가 차분해지고 경건해지는 느낌. 주차를 한 후 주차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입구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문우당을 나오면서 그 문은 정문이 아닌 후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문은 문을 열면 바로 서점 공간이 보이지만 후문은 작은 포치 같은 공간을 지나 서점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 읽는 사람들을 방해하면 안 되는 도서관에 까치발을 하고 들어가듯이.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입장권을 구매하고 들어가야 하는 느낌이 들었다. 서점에서 느끼기 어려운 느낌임에는 분명했다. 조심히 천천히 1층의 책들과 아기자기한 꾸밈에 감탄을 하면서도 역시나 나의 눈은 네모 틀의 글귀를 분주히 찾고 있었다. 마침내 내 눈에 들어온 계단과 벽 그리고 글귀. 2층으로 올라가면서부터 나와 짝꿍은 고개를 들어 글귀를 읽기 시작하였다.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이 만든 책이 다시 사람을 만드는 뫼비우스의 띠가 뿜어내는 신비를 느끼고 있었다. 마치 SF영화의 주인공이 알 수 없는 레이저 빔에 의해 온몸에 무언가 새겨지는 것처럼. 분명 그 주인공은 세상을 구할 힘을 가지게 되던데 어쩜 나도 세상까지는 몰라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한 에너지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한참을 행복한 상상에 빠져본다.


나는 서점을 좋아한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울산에는 '강남서점'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입시 학원 1층에 있는 서점이었는데 제법 규모가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사실 난 학원이 끝난 후 그 서점 한 구석에 앉아 책 읽기를 더 좋아했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나와 책만이 오롯이 소통하는 느낌이었다. 소소한 지적 사치와 허영을 부리는 공간이었다. 대학을 다른 지역으로 가면서 더 이상 그 서점을 찾지는 않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입시의 긴 터널을 지나가던 중에 잠시 머물러 쉬는 '쉼표'로 선명히 남아 있다. 그리고 대학을 다니면서 대구에 있는 제일서적과 제일서적의 분점인 제일문고를 많이 다녔다. 옆에 교보문고가 있었지만 난 어딘가 모르게 전국구 교보문고보다는 제일서적이 더 좋았다. 그리고 나중의 일이지만 내 짝꿍이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 바로 제일서적이었다. 짝꿍이 제일서적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그 무렵 나는 대학원에서 상담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구하기 어려운 책들이 많았다. 책을 구한다는 핑계로 제일서적을 들락거리며 그 당시 선배였던 내 짝꿍에게 밥 먹자 술 먹자 많이도 보챘었다. 강남서점도 제일서적도 제일문고도 이젠 내 기억 속에만 있다. 존재가 막을 내렸으니 유한하지만 내 기억 속에 있으니 무한한 곳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문우당에서 애니메이터가 꿈인 나의 햇살이에게 줄 날씨의 아이 아트북을 사고, 나의 요술이에게 줄 장군이의 떡집을 사고, 짝꿍과 나는 '기록을 한다. 그 안에서 나만의 생각을 담고, 찾고, 이야기한다.'라는 문구가 적힌 안도 까맣고 겉도 까만 문우당 로고가 찍힌 연필세트를 샀다. 곳곳에 적혀 있는 책 속의 글귀들을 읽으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쯤 사장님이 옆 공간을 추천해 주었다. 공연이 끝난 줄 알았는데 가수가 스스로 앙코르를 해 주는 느낌.


짝꿍과 나는 아이들에게 줄 선물과 사장님이 챙겨준 문우당 굿즈들을 챙겨 들고 옆 공간인 '문단'이라는 작은 공간으로 이동하였다. 문단은 계단실을 활용하여 만든 작은 문구점인데 '문우당의 계단'이라는 뜻과 '문단에 등단한다.'라고 할 때의 그 문단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연필, 지우개, 가위, 메모지, 수첩 그 외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얀 벽과 기둥 아래에 알록달록한 문구류들은 문우당의 마스코트 같았다. 아마도 문우당이 조금 더 오랫동안 사람들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문우당과 문단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봤다. 나와 짝꿍이 문우당에서 보낸 시간 동안 함께 보고 느꼈던 것들이 기억으로만 남지 않길 바라면서. 강남서점도 제일서적도 제일문고도 나의 시간을 함께 채워준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볼 수도 갈 수도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오로지 기억과 옛 사진 속에 남아 있을 뿐이라 그 공간도 그 시간도 그리울 때가 있다. 대형 서점에 밀려 사라진 것인데 시대의 변화이니 누구를 탓할 수는 없지만 누구를 탓할 수조차 없다는 것 또한 안타까움이다.

 

동네 책방이 시간이 흘러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리는 공간으로,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하루 중 짧은 쉼표 같은 시간을 누리는 공간으로. 그렇게 문우당은 속초 사람들과 낯선 여행자들에게 오래 남아있길 바라본다. 기억 속의 뫼비우스 띠가 아니라 들어가 볼 수 있고 새로운 인연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실제 공간으로의 뫼비우스의 띠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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