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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l 31. 2022

영금정의 억울함. 뒤 바뀐 운명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12

속초등대전망대를 올랐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애매한 상태로 짝꿍과 나는 다시 동명항이 보이는 곳에 있는 영금정으로 향했다. 속초라고 하면 영금정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해서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파도소리가 높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바닷가에 아담한 바위산이 하나 보였고 그 위에 사람들이 가득한 정자가 멋들어지게 세워져 있었다. 우린 한눈에 영금정을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옆 바다로 긴 다리가 있고 다리 끝은 평평한 암반에 걸쳐져 있었는데 그 위에 또 정자가 있었다. 나와 짝꿍은 어느 것이 영금정인지 한참을 추측을 해 보았다. 바다에 다리까지 놓고 그 위에 정자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다리 끝 정자가 영금정일 거라는 추측과, 오래된 영금정이니 현대식 다리 위에 있지는 않을 터 아담한 바위산 위 정자가 영금정일 거라는 추측과, 소중한 문화유산이니 다리를 현대에 다시 만들지 않았겠냐는 나름 논리적인 추측들을 했다. 그러나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고 이럴 때가 바로 짝꿍의 빠르고 확실한 써치 능력이 빛을 발할 때이다. 잠시 후 우린 두 정자 모두 영금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로 놀라웠다. 영금정은 그 정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자 아래에 묵직하게 눌러앉아 있는 바위산과 암반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말하자면 주인공 바위산 위에 영금정 정자가, 주인공 암반 위에 갯바위 정자가 다소곳이 올라앉아 있는 것이었다. 짝꿍과 내가 했던 것과 같은 오해와 추측을 그동안 영금정은 얼마나 많이 받으며 이곳을 지켰을까. 그 억울함이 켜켜이 쌓여 더욱 단단해진 것은 아닌지.


그런데 유명한 것과는 다르게 좀 규모가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영금정의 세월을 살펴보니 더 억울한 운명이 있었다. 원래 조선시대 문헌에 따르면 영금정 일대에 선녀들이 밤이면 몰래 내려와 목욕을 하고 신비한 곡조를 읊으며 놀았다고 하여 '비선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곳 바위산의 형상이 정자를 닮아 있고 바위산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하여 영금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영금정은 지금처럼 아담한 바위산과 암반이 아니라 높은 바위산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속초항 개발을 위해 영금정은 부서졌고 그 파편들로 동명항 방파제를 쌓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영금정은 지금과 같이 아담한 바위산과 주변 암반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영겁의 시간을 거쳐 그 자리의 주인이 된 정자를 닮은 바위산을, 파도의 연주에 거문고 소리로 화답하던 영금정을 개발의 목적으로 부숴버리다니 참으로 영금정은 억울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금정의 마음을 아는지 갯바위 정자 아래에 들이치는 파도는 정자를 통째로 삼킬 만큼 커다란 입을 벌리고 달려와 차마 미운 사람들을 삼키지는 못하고 하얀 거품을 내며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파도의 거침과 아름다움의 양면을 보고 있노라면 억울함을 토해내고 또한 이해하려 노력하고 어쩜 체념해 가는 처연한 영금정의 마음이 담뿍 담겨 있는 듯하다. 영금정에 쉼 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짝꿍은 파도 처음 보는 사람 같다고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영금정의 세월을 오롯이 기억하는 파도가 말없는 영금정을 대신해 한풀이를 해 주는 의식에 조용히 참여해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때로는 가만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같이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 또한 위로를 받고 힘을 받기도 한다. 영금정을 다시 찾게 되는 누군가가 있다면 과거의 높고 아름다웠던 영금정을 한번 상상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영금정이 더 이상 억울하지 않도록 바위산과 암반을 보고 나지막이 이름을 한번 불러주길 바란다. 그리고 영금정의 오랜 벗 파도가 대신 들려주는 한풀이도, 영금정과 파도가 함께 하는 이중주에도 한번 귀를 기울여 주길 바란다. 오래 같이 머물며 서로를 위로해 주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도록.



#영금정 #강원도 #속초 #비선대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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