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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Aug 03. 2022

코스모스와 지그재그. 질서와 조화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8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오는 길에서는 들어갈 때 미쳐 보지 못했던 나무며 풀이며 흙이며, 눈길이 머무는 하나하나에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10월의 찬 바람이 슬슬 불어오긴 하지만 아직 단풍도 시작되지 않은 10월의 초라 풀들이 모두 짙은 초록색이다. 짙은 초록색 사이로 예쁜 분홍색이 눈에 들어왔다. 꽃의 여신 클로리스가 실수로 떨어뜨리고 갔는지 아님 씨앗 하나가 혼자서 여행을 하러 왔는지 친구 코스모스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 한 송이 코스모스가 덩그러니 피어 있었다. 코스모스는 대개 무리를 지어 피어나는데 저렇게 홀로 피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애처로움이 따라왔지만 왠지 모르게 씩씩해 보였다.


코스모스가 길가에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것은 흔한 풍경이라 마치 코스모스가 우리나라의 야생화인 듯이 보이지만 실은 멕시코에서 온 국화과의 귀화식물이라고 한다. 멕시코에서 왔다는 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꽃에게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귀화'라는 표현을 쓰는 게 신기하고 재밌다. 코스모스가 피고 고추잠자리가 날면 가을이 왔구나 싶고,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농촌의 들녘이 생각나는 걸 보면 코스모스가 귀화를 제대로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하고 외모도 우리와 비슷해, 보는 사람마다 '외국인이라고? 진짜?'라는 말과 함께 뒤돌아 보게 만드는 사람 같은 느낌. 그냥 한국 사람 같은 느낌. 그래서 '살사리꽃'이라는 한국식 이름도 있나 보다. 이 이름은 바람에 살살거리며 반기는 모습 '살살이'에서 '살사리'로 변했는데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코스모스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예뻐 보이기도 하지만 가냘프고 힘없는 존재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신들이 가장 먼저 생명력을 불어넣은 영광의 꽃이기도 하고 이 가냘픔을 채우기 위해 다른 꽃들을 만들다 보니 세상에 이렇게 많은 꽃들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감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코스모스를 바람에 맞서 투쟁도 못하는 나약한 존재라기보다는 바람과 함께 어울리는 방법을 알고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유연해서 조화롭고 그래서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실제 코스모스는 우주, 조화, 질서 등의 의미를 가지는 그리스어 kosmos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나는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에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꼭 일 년에 한 번씩 전학을 했다. 3월이면 교실에 아이들이 가득했지만 모두 낯선 얼굴들이라 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마치 저 짙은 초록색 풀들 사이의 코스모스처럼. 그리고 어디라도 속해 밥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쯤이면 그래도 마음 착한 짝꿍이 다가와 겨우 혼자 밥을 먹는 것만은 피하게 되어 안도하며 서서히 아이들 사이에 스며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무사히 3월이 지나고 교실에 적응하고 잘 지내다가도 가을이 되면 또 한 번의 있는 듯 없는 듯 아이들 사이에 스며들고 싶은 시간이 다가온다. 바로 가을 운동회다. 예전에는 운동회를 한다고 하면 한 달 전부터 같은 학년 여학생들만 따로 모아서 군무를 연습시켰다. 공부 대신에 군무를 연습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군무를 할 때에는 키 큰 아이들이 앞에서부터 줄을 맞춰 선다. 키 작은 아이들이 앞에 서면 키 큰 아이들이 뒷줄에서 팔을 다 뻗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가장 키가 작았던 나는 당연히 제일 뒷줄에 서게 되는데 그게 문제였다. 나는 짝꿍이 있을까? 없을까? 늘 아이들 머릿수를 세며 마음을 졸여야 했다. 짝꿍이 있을 때 보다 없을 때가 많았고 그럴 때면 나는 옆에 짝꿍이 있는 듯이 혼자서 춤을 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제일 뒷줄이라 사람들 눈에 제일 잘 띄는 곳에서. 그럴 때마다 짝꿍을 찾는 나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가 짝꿍이 있으면 또 불안이 바닥까지 내려가는데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짝꿍이 있다가도 혹 누가 아파 결석이라도 하면 또 짝꿍이 없어지니 내 마음의 불안은 늘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사람의 마음속 불안은 정말로 지그재그 모양으로 나타난다. 심리검사 중에 다면적인성검사라는 것이 있다. 일명 'MMPI'. 사람의 심리상태를 10가지 척도로 수치화하는 것인데 쉽게 말하면 100점 만점에 40점부터 70점 사이를 비교적 괜찮은 상태로 좀 문제가 생기더라도 스스로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70점 이상은 힘든 상태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고, 40점 이하는 너무 괜찮아 걱정이니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을 한다. 그중 7번 Pt척도, 바로 사람들의 두려움, 걱정, 불안 등을 측정하는 강박증 척도인데 처음에 강박증이 나타나면 당연히 힘든 상태로 수치가 치솟았다가 안정을 찾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 너무 괜찮아 걱정이니 살펴봐야 한다는 상태로 내려가기를 반복하다가 좀 더 안정을 찾으면 비로소 괜찮은 상태가 된다. 이때의 그래프를 보면 지그재그 모양이다. 


지그재그 모양은 우리 주변에 흔하다. 지그재그 모양의 대부분은 무언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할 때가 많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첫 번째 안정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에는 자전거를 처음 배워 잘 타지 못하는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자전거 바퀴 자국이 있다. 그리고 거나하게 술을 한 잔 걸치고 걸어가는 사람의 걸음걸이도 지그재그다. 산통을 겪고 있는 모성의 배에서 감지되는 진동도 지그재그이고 지구가 몸살을 앓을 때 흔들리는 진동도 지그재그다. 두 번째 그 자체로 완벽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바로 심장 박동을 나타내는 시그널이다. 반드시 지그재그 라야하고 그래야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 곁에 머물 수 있다. 그래서 삐뚤빼뚤 지그재그는 위험함을,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아직은 생명이 유지되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생존을 위한 신호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그재그도 분명 그 안에 질서와 조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예측이 가능하고 대비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조화와 질서를 의미하는 코스모스와 안정되지 않은 상태와 그 자체로 완벽한 상태를 의미하는 지그재그를 '안정, 적응'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함께 넣어 두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니 불안하고 안정되길 반복했던 나의 어린 시절도 어쩜 살아 있다는 과정이었으며 분명 의미가 있었을 텐데,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마음이 단단해 요동치는 마음의 지그재그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질서와 조화를 생각한다거나, 무언가 예측하고 대비하는 건 어린아이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그런 시간을 거쳐 내 마음에 질서와 조화가 생기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웬만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늘 새로운 환경에 준비 없이 놓였고 적응하려 무던히도 노력하는 나의 마음은 언제나 지그재그였다. 그리고 또 어떻게든 적응하고 그 안에서 어울려 지내는 나를 보면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돋고 엉켜 자라 끝까지 살아남는 '잡초'를 닮은 구석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나는 코스모스였던 것 같다. 나는 기어이 그 무리 안의 질서에 적응하고 조화를 이루어 안정과 적응을 이루어 내었는데, 내가 만든 '안정, 적응'의 카테고리에는 잡초가 없으니까. 내가 만든 '안정, 적응'의 카테고리에는 코스모스와 지그재그가 있을 뿐이다. 다행이다.



#인제 #강원도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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