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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Aug 15. 2022

전광형 구도. 구불구불 오솔길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7

자작나무 숲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이 있다. 자작나무 숲 안내소의 직원은 반드시 이 큰길을 따라 다녀오라고 했다. 비가 와서 다른 길은 질퍽하니 걷기가 힘들다며. 늘 안내하는 사람의 말을 잘 따르는 편인 나는 절대로 그러겠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출발했다. 그런데 조금 숲으로 들어서니 큰길 옆 쪽으로 난 사이사이 오솔길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큰 길도 좋아하지만 작은 오솔길도 좋아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작은 풀꽃들이며 작은 곤충들을 더 느긋하게 볼 수 있고 무엇보다 조용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내가 상담과 강의를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직업병이 있다. 내담자의 말에 숨어 있는 마음을 읽고 위로해야 하고, 강의실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질문들의 순서를 공평하게 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답을 정확히 해야 하므로. 그래서 여행을 할 때에는 가능하면 한적한, 내 귀가 쉴 수 있는 곳을 선호한다. 그런 곳 중 하나가 오솔길이다. 특히나 오늘처럼 짝꿍이 옆에 있어 무서울 것 하나 없는 날은 더욱 그렇다.


오솔길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몇 안 되는 학생 시절의 좋은 기억. 그것도 선생님과 시험에 관련된 기억. 내가 다닌 여중에 갓 부임한 미술 선생님이 있었다.  이 미술 선생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교과 내용보다는 상상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미술 시간만큼이라도 학교 벽이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해 우리를 흥분시켰으며, 교생 실습을 왔다간 모범생 수학 선생님과 친 자매라는 사실에 우리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던, 선생님이라기보다는 과외해 주는 대학생 언니 같았다. 그래서 학생 입장에서 나는 수업 시간이 편하고 재밌고 좋았다. 또 과목이 미술이다 보니 뭐 사실 그렇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학교 입장에서 다른 선생님들은 이 미술 선생님에 대해 '아이들을 선동질해서 면학 분위기를 망친다.'라는 낙인을 찍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미술 선생님 탓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발생했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볼 때면 책임지지도 감당하지도 못할 학교 변화에 대해 뭘 그리 열심히 이야기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냥 조용히 수업만 하면 편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가 왜 선생님을 걱정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종합하면 철딱서니 없는 언니 같아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나 존경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미술 선생님이 처음으로 선생님처럼 느껴진 날이 있었다. 동그라미와 날카로운 직선이 마구잡이로 그어져 있는 미술 시험지 한 다발을 옆구리에 끼고 미술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나타났다. 드디어 학교에서 요구하는 선생님의 모습으로 변신하려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구겨질 자존심을 나는 미리부터 버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교탁에 시험지를 펼치고 번호순으로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내었다. 반에서 키가 제일 작았던 나는 언제나 1번이라 익숙하게 첫 번째로 불려 나갔다. 내 눈앞에 시험지가 펼쳐치고 당연히 싫은 소리가 들리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은 야단치는 대신에 내가 틀린 문제들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너무 기대하지 않은, 아니 기대할 수도 없고 그동안 경험해 보지도 못한 순간이라 당황스러워 설명을 듣는 내내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딱 한 문제만큼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시험지에 번개 같기도 하고 지그재그 모양을 길게 늘여놓은 것 같기도 한 선을 그려놓고 '이 구도는 어떤 그림과 어울리나요?'라는 문제였다. 선생님은 빨간색 색연필로 선을 따라 그리며 '오솔길'이라고 말해 주었다. 얼마 후 자의인지 타의인지 미술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발령을 받아 갔고 더 이상 나는 선생님을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다시 알게 되었다. 그 구도가 '전광형 구도'라는 것을. 이 전광형 구도는 사선구도의 복합형으로 움직임, 속도, 긴장감 등을 표현할 때 쓴다고 한다. 우연이겠지만 선생님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구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시험 문제를 출제한 사람도 바로 미술 선생님이었으니 선생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닮은 구도를 시험지에 출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 이후 오솔길을 볼 때마다 그 미술 시간이, 그 미술 시험지가, 그 미술 선생님이 떠오른다. 따뜻했던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어쩌면 미술 선생님도 복잡하고 힘든 초임 교사 시절에 잠시나마 오솔길을 걷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짝꿍과 함께 큰길을 걷다가 살짝 오솔길로 들어서 본다. 오솔길은 원래 그곳의 주인들이었던 나무와 풀, 작은 동물과 곤충들의 삶을 침범하지 않고 생긴 타협의 길인 것 같다. 그래서 구불구불하고 더 정감 있고 생명의 길 같아 보인다. 마치 북촌 한옥마을 같은 느낌이랄까. 분명 관광지이지만 그곳에 삶을 두고 있는 주인들이 있어 살펴보는 것과 조심하는 것을 동시에 해야 하는 느낌. 그래서인지 나는 오솔길에 가면 큰길을 다닐 때 보다 더 조용하고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숲에 갈 때면 내 아이들에게서 배운 숲 인사를 한다. 숲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 '숲아. 나 들어가도 되니?'라고 물어보고 바람 소리와 나뭇잎의 흔들림으로 답을 들은 후 '허락해 줘서 고마워.'라고 인사하는 것이다. 내 아이들은 숲 유치원에 다녔었다. 말 그대로 숲에서,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모토로 매일 유치원이 위치해 있는 숲을 산책하는 것을 핵심 교육으로 삼는 유치원이었다. 여느 유치원과 마찬가지로 흔히 하는 부모 참여 수업을 갔다가 아이들이 숲에 들어가기 전에 인사하고 산책이 끝나면 또 다음에 오겠다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그날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 나도 숲에 들어가기 전에 늘 인사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아이들이 없고, 사람들이 나와 짝꿍을 이상하게 쳐다볼까 봐 아이들과 하던 숲 인사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오솔길을 들어설 때마다 마음으로 눈으로 인사했다.


'숲아. 오솔길아. 나 들어가도 되니?'

'허락해 줘서 고마워.'


짝꿍과 손을 잡고 호젓한 오솔길을 조심히 걸었다. 



#인제 #강원도 #여행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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