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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Aug 01. 2022

보이지 않는 뿌리. 사람의 자존감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6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한 곳에서 그렇게 크게 자라는 걸 보면 경이롭다. 내가 사는 곳은 30층 정도의 아파트가 가득한 도시인데 키 큰 나무는 아파트 4~5층까지의 높이를 자랑한다. 가끔은 혼자 서 있는 것이 힘들어 지지대에 기대 있기도 하고 단단한 줄에 고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멋진 나무는 아름드리 줄기에 쭉쭉 뻗은 가지와 풍성한 잎을 가지고 있으며 바람에 살랑이고 잎들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나무 사이를 걸을 때면 나무를 보기 위해 고개를 힘껏 뒤로 젖혀 하늘에 시선을 두었었다. 그런데 첫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후부터는 나무 사이를 걸을 때면 늘 땅만 바라보고 걷게 되었다. 행여나 아이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리고 아이가 정말 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애꿎은 나무 뿌리를 탓하곤 했었다.


중학교 과학 시간에 민들레에 관한 단원이 있었다. 실습을 위해 민들레를 직접 가지고 학교에 가야만 했는데 초등학생도 아니고 식물 채집을 하라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집 주변 공터에는 민들레가 한가득 피어있었다. 당연히 어렵지 않게 채집에 성공할 줄 알았다. 민들레 채집의 요건에 따르면 민들레를 뿌리째 캐야 한다고 한다. 그쯤이야 하는 생각에 나는 가볍게 호미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민들레의 키가 작아서 금세 뿌리를 캘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땅을 파는데 가운데에 제법 굵은 뿌리가 계속 계속 땅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땅을 파면서도 얼마나 더 파야 하는지, 이러다 땅 속에서 지렁이나 뱀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호미를 든 손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결국 뿌리는 끝까지 다 캐지지 못하고 중간에 잘려 버렸다. 그러나 내가 처음으로 본 민들레의 뿌리는 땅 위에 보였던 줄기와 잎, 꽃 전체 길이의 3배 정도는 되었다. 식물이 양분을 빨아들이고 제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제 몸 보다 훨씬 길고 튼튼한 뿌리가 땅 속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때는 내가 정말로 대단한 민들레를 발견한 줄로만 알았었다. 민들레 돌연변이를 발견했으니 학계에 보고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엄청 흥분하여 혼자서 별 생각을 다 했었다.


심리검사 중에 [집-나무-사람] 그림검사라는 것이 있다. 투사검사인데 쉽게 말하면 집, 나무, 사람을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후 조금 더 내면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는데 내가 꼭 나무 그림에 대해 하는 질문이 있다. '이 나무의 뿌리가 다리가 되어 어디론가 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은가요?' 사람들은 한참을 망설이다 저 마다 소망하는 곳을 말한다. 그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는 답은 '다른 나무들이 있는 숲으로 가고 싶어요.'와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요.'였다.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하고 교류하며 살길 희망하고 때로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탁 트인 공간을 소망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면 나는 뿌리가 발목을 붙잡는 장애물 같이 느껴졌다.


짝꿍과 둘이서 자작나무 숲에서 근사한 자작나무를 보느라 예전처럼 고개가 한껏 뒤로 뒤로 젖혀졌다. 그러다 발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내가 자작나무의 줄기와 가지와 잎을 보느라 미쳐 뿌리를 발견하지 못한 탓이었다. 순간 나는 놀라 짜증을 내기보다 '미안, 자작나무'라고 자작나무에게 사과를 하는 나를 발견하였다. 뿌리가 더 이상 나무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아니라 소중한 나무의 일부라는 사실을 어느새 알게 되었나 보다. 또 한참을 걷는데 이번에도 발에 무언가 걸렸다. 길 가에 쓰러져 있는 나무였다.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었고 가지도 여기저기 많이 부러져 있었다. 키도 크고 튼튼해 보였는데 저렇게 쓰러지다니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나는 뿌리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느끼게 되었다. 아무리 세찬 비바람이 불어도 결국 나무를 버티게 해 주는 건 아름드리 줄기도, 곧게 뻗는 가지도, 풍성한 잎도 아닌 뿌리라는 사실. 한 곳에 박혀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게 생명을 주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생명유지장치 말이다.


이런 나무의 뿌리가 사람에게도 있다. 바로 '자존감'이다. 자존감과 자신감은 일란성 쌍둥이 같다. 분명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으나 시작점은 같으며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것이 꼭 쌍둥이와 닮았다. 자신감은 '할 수 있다. 없다.'라는 능력에 관한 평가이고 자존감은 '난 가치가 있다. 없다.'라는 존재에 관한 평가인데 둘 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임에는 동일하다. 그리고 둘은 모두 연속되는 인간관계 속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통해 발현하고 성장하기도 하고 반대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통해 꺾여 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무가 올곧게 서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귀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땅 위의 모습보다 몇 배나 더 크고 튼튼한 땅 속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나무의 땅 속 모습, 사람에게는 내면의 모습일 것이다. 튼튼한 자존감을 마음 깊이 뿌리내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길 소망한다.


[집-나무-사람] 그림검사는 상담이 종결될 무렵 또 한 번 하게 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단단한 마음의 뿌리를 내려 나의 반복되는 질문에 더 이상 어디론가 떠나질 않길 바란다.

 

'이 나무의 뿌리가 다리가 되어 어디론가 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은가요?'

'어디 안 갈래요. 여기서 깊이 뿌리내려 난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나를 보러 사람들이 올 거예요. 내 그늘에서 쉬고 놀고 같이 행복하려고요.'


내가 먼저 이런 사람이 되려 한다. 



#인제 #강원도 #자작나무숲 #뿌리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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