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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Aug 28. 2024

어른의 좀 다른 여행 준비

요즘 안녕하시지요?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책장에서 누군가의 내면이 보인다는 말에 은근히 동의가 되고, 나도 모르게 내 책장을 가만히 둘러보게 되었다. 나이대별로 다른 책이 자리를 잡고 있음이 내 눈에 선명히 보였다. 내가 아주 어릴 때 그때는 책장이랄 것도 없었겠지만 내 책이 있던 곳에는 당연히 동화책이 있었다. 스무 권 남짓한 안데르센 동화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하나 특별히 기억나는 건 동화책에 크레파스로 색깔을 칠했다가, 골드크림으로 닦아서 지우며 색칠 놀이를 할 수 있는 동화책이 있었던 것이다. 그 시대에 분명 신기한 책은 맞았지만 난 그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가 얼굴에 바르기도 아까워 아끼던 그 골드크림으로 장난을 칠 수는 없다는 그런 기특한 생각을 꼬꼬마 시절의 내가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비싸고 아까운 골드크림을 써가며 색칠 공부를 시켜주는 만큼 잘하라는 엄마의 무언의 압력이 더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가 되어서는 책 방문 판매를 하는 친척의 권유로 자의 반 타의 반 엄마가 사 준 세계사 전집과 과학책 전집 등이 있었던 거 같고 중고등학교 때에는 보기만 해도 지겨운 참고서만 가득했던 것 같다. 늘 내 참고서는 나와의 소원한 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듯 나의 손이 타지 않은 새하얀 상태로 짧은 생을 마감하곤 했었다. 그리고 20대가 되어서는 아동학 관련 전공 서적과 놀이치료와 상담 관련 서적들을 많이도 사서 쟁여 놓고 읽기고 하고, 다음에 읽겠지 했던 책도 더러 보였다. 부모님께 손 벌려 공부하던 그때에도 책 욕심은 많아서 늘 새 책으로 공부를 하던 고약한 습관이 나에게 있었다.


그 책장 책들 사이사이로 여행책들이 간간히 자리를 잡고 있다. 나를 한갓지게 만들어 주었던 귀한 동무들 같은 책이다. 내 비롯 배운 게 양육이고 할 수 있는 게 상담이라 부모들이 읽을 법한 양육책을 쓰고 강의를 하며 생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이토록 여행글을 쓰고 싶은 건 아마도 내가 느낀 그 한갓짐을 누군가에게라도 스며들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틈에서 조용히 나를 내려놓고 평소와는 조금 다른 시간을 사치 부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간의 사치가 신경 쓰이고 제발 이번 시간의 사치가 충분히 잘 끝날 수 있기를, 시간의 사치가 이야깃거리가 되고 두 손 가득한 선물 보따리가 될 수 있길 소망하며 준비에 또 준비를 하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눈이 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오후 상담을 가기 전 잠시 짬을 내어 집에 들렀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짝꿍과 꼬들한 라면을 먹으며 보름 뒤에 떠날 여행 준비에 대해 떠들어 대던 날이었다. 기분 좋게 오후를 시작하고 상담도 잘 마무리되어 갈 시점에 가방 속에 있던 핸드폰이 자꾸만 울렸다. 상담을 마치고 확인한 핸드폰의 부재중 전화. 엄마, 남동생, 짝꿍의 전화가 연이어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백이면 백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인데, 이렇게 급한 일이라면 왜 아빠가 한 전화는 없을까. 불안에 손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누나, 아버지가 돌아.. 돌아.. 가셨어."


전화 너머로  떨리는 동생의 목소리와 엄마의 울음소리.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그 순간 나는 참으로 황당한 질문을 동생에게 던졌다. 아빠가 돌아가신 거냐? 돌아가시려고 하는 거냐? 사람이 사람을 너무 믿고 의지하면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는 걸 그때 알았다. 예고되지 않은 죽음이었다. 짐작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현실적이지 않은 죽음이었다.


어릴 때에는 이모 고모 삼촌들의 결혼식에, 조금 더 자라서는 친구들의 결혼식에,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났을 때는 돌잔치에, 그리고 지금은 장례식에 참석할 일이 많아졌다. 햇살이가 벌써 스물이니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럴 나이가 되었다는 쓸쓸함이 한기를 잔뜩 품고 있는 그즈음 나에게 이상한 믿음이 생겨버렸다. 여행을 가려고 한 어느 날 시댁 고모부님의 부고가 들려왔다. 여행을 가려고 한 어느 날 친구 아버님의 부고가, 여행을 하는 중간 어느 날 선배의 부고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와 짝꿍이 결혼 20주년을 기념하여 웨딩촬영 여행을 떠나려는 며칠 전에 나의 온돌 외할머님의 부고가 나에게 도착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나의 여행은 소중한 누군가의 죽음을 그리고 그의 부고로 돌아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짝꿍과 나는 여행에 대해 절대로 주변에 알리지 않는 무언의 행동 규칙이 생겼다. 그리고 주변 어르신들의 건강이 어떤지 살피고 또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늦봄이 지나면 외할머님이 돌아가신 지 2년 정도가 되는데 아직은 아무런 일이 없다. 다행이다. 아무 일도 없는 이 시간이 제발 조금만 더 잘 버텨주길 바란다.


하나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모이고 반복되면 그 사람에게 신념이라는 게 생기게 된다.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인과관계가 절대로 설명되지 않는 일명 '징크스'라는 것이다. 나와 내 짝꿍은 징크스라는 걸 믿지 않은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 징크스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린 심도 있는 토론의 장을 마련했다.


우리가 여행만 가려고 하면 부고가 오는가? 아니다. 여행을 갔으나 부고가 오지 않은 날도 많았다.

그럼 왜 여행과 부고가 겹치는가? 그건 우리가 여행을 자주 가기 때문이다.

또 여행 가려고 할 때 부고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나이가 된 것이라고 서로를 위로한다.

앞으로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전에 어르신들의 건강을 잘 체크한다.  


여행과 부고 사이의 징크스를 만들지 않기 위해 나와 짝꿍은 여행 가기 전에 조금 특별한 준비를 한다.


'요즘 안녕하시지요?'


제발 나와 짝꿍이 졸업여행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 졸업여행 한 번을 못 가 보고 학창 시절을 마무리한 햇살이 몫까지 더 잘 놀고 오리라 마음먹음 다짐이 결코 수포로 돌아가게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니 말이다.



#이탈리아여행 #육아 #부부여행 #양육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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