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운동을 다녀와서 인도식으로 라체 파라타와 과일 샐러드를 먹으려는데 아침부터 초인종이 울립니다. 뭔가?하고 나가보니 어린 아이들 7,8명이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인사를 합니다. 마스크도 없이 꼬까 옷을 입었습니다.
처음 온 친구 손을 이끌고 두번째 왔기에 사진 찍고 사탕도 더 주었다.
사탕을 먹어서 목이 마른지 물달라고... 아이들 눈망울이 또랑또랑하다.
아하, 인도에선 일년에 두번 나브라트라(3-4월과 10-11월중 두번 있음, 9일간의 축제)가 끝날 즈음에 아이들이 뭔가 기대하면서 벨을 누르는 것을 알기에 지난번에 사다놓은 사탕을 꺼내서 2,3개씩 나눠주었습니다.
오늘이 'Durga Ashtami' 또는 'Maha Ashtami'라 하며 5일 간의 Durga Puja 축제 중 가장 상서로운 날 중 하나랍니다. 전통적으로 힌두교 가정에서는 10일 동안 단식과 푸자들을 하지만 '판달'(절이나 공터에 두르가 여신을 장식하고 푸자를 드리게 만들어놓은 것)에서 일어나는 실제 푸자는 5일 동안 열립니다.
10월 15일 금요일은 인도의 큰 공휴일이자 축제중의 하나인 두세라(Dussehra)로서두르가 여신이 사악한 버팔로 악마 마히샤수라에 대한승리를 축하하는 날로 열흘간 축제기간의 휘날레를 말합니다.
어쩐지 아침운동길에 들른 템플에서는 푸자를 드린다고 향기로운 꽃을 따고 불피우기를 준비하는등 바쁘더라고요. 우린 또 붙잡히면 한동안 있어야 되서 서둘러 돌아왔거든요.
옆집 친구는 여자 아이들 3명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서 나누고 옷이나 다른 필요한 물건들을 나눈다고 합니다. 아마 본인의 딸을 잃었기에 여자 어린이들에 대한 정이 더 애틋한 듯 합니다.
그리고 우리집에도 준비한 음식을 보냈네요. 예년에 비해 간소하게 보냈습니다.ㅎ 점심으로 먹어야지요. 계속 인도음식만 먹게 되는 오늘입니다.
이런 날 괜시리 생각나는 어른이 계십니다. 울 옆집에 사셨어요. 그분 전에는 인도 제일의 신장전문의사부부가 살고 있었고... 제 절친, 돌리입니다. 돌리가 구루가운 아파트로 떠나고 나서 미슈라 모한 할아버지가 몇개월에 걸친 보수를 거쳐서 들어오셨습니다. 돌아가신 부인을 기려서 '닐루 니와스'라고 벽에 이름을 붙여놓으셨어요.
약 2년 정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명절이 가까이 오면 그분의 따뜻함이 떠오릅니다.
칠순 초반으로 알고 있는데, 집 보수를 할 때 아무도 거들떠 보지않는 집 앞, 뒤, 동네 공용길을 자비를 들여서 시멘트와 마블로 깔끔히 덮었습니다. 몇푼 드냐고 할 지 모르나 이웃을 위해 베푸는 맘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절대 아니지요.
한국서 사와서 선물한 도리구찌 모자를 겨울 내 꼭 쓰고 계셨다. 부모님처럼 언제나 자상하셨다.
아침에는 멀리 거동하지 않고 집 앞을 걷곤 하셨는데, 겨울철 햇볕드는 양지에 바깥에 테이블을 놓고서는 차 한잔 드시는 평화로운 모습을 자주 보곤 했습니다.
특히 두르가 푸자 즈음해서 동네 주변의 어린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벨을 울리면 그분은 아예 점심으로 푸짐하게 준비해서는 집 대문앞에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는 일회용 접시에 일일히 담아서 직접 얘들에게 건네주었는데, 이때 우리 부부는 아이들 줄을 세운다든지 허드레 일들을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집에 모아둔 1,2루피 짜리 동전이 많아서 그것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모한 할아버지는 외교관 출신으로 여러 국가들의 대사를 역임한 엘리트였습니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뭐든 막힘이 없었습니다. 특히 우리 막내를 매우 대견해 하셨는데...막내가 대학 입학 후 델리를 떠나 서울로 갔을 적에는 우리 부부가 상당히 적막했었지요. 막내가 서울서 잘 적응해야 할텐데... 그러나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막내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자주 말하곤하여 우리 부부는 고심이 크던 때였습니다. 그분께 인사차 차를 마시러 가서는 막내를 어떻게 하는게 좋을 지 조언을 들었습니다.
매우 명쾌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아이가 컸으니 본인의 의견을 들어주는게 좋다. 이제 품안의 자식이 아니며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더라도 자기 나름의 생각과 식견을 믿어주는게 좋다. 특히 어려서 해외에서 성장하면 본국에서 성장하는 아이들과 여러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해외에서 컸으니 해외에서 자리 잡을 확률이 높을거다....아이가 잘 컸으니 염려하지 말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그분이 조언한 대로 막내는 지금 자기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외지에 살아서 어른들 조언이 아쉬운 세상에서 그분은 우리 막내를 자신의 손자처럼 따뜻하게 자상하게 살펴주셨기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한국으로 복귀해서 제3국에 있다고 들었던 선교사 부부가 선교 위한 학교부지를 구매했는데 더이상 인도 입국이 금지되어 팔았으면 좋겠다며 저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인도지인들에게 몇군데 알아봤는데 반응이 미적지근하던 차에 어른께 물었더니, 주말에 바람쐬는 셈 치고 함께 다녀오자고 하셨습니다. 마네사 근처이기에 하루 날 잡으면 되고 괜찮으면 본인이 살 의향도 있으시다고 하셨어요. 저의 부부말을 믿기에 또 상황이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시려는것이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투자를 하지 않으셨지만, 여러 가지 도움되는 말씀들을 알려주셨습니다. 부지 위치며 동네 특성, 그리고 앞으로 개발 여지 등 폭넓은 안목을 말씀해 주셨지요.
그는 2019년 초여름, 저희가 갑자기 서울을 가게 되었을 때 주말이라 모든 것이 어려웠는데 화분에 물주기를 부탁드리려고 열쇠를 맡기러 갔더니, 어찌 아셨는지혹시 돈이 필요하면 융통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셔서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인도에서 되도록이면 인도인이나 교민들과 돈으로 엮이지 말라고 조언하는 측이었거든요... 주말이라 비행기표 구입이 큰 문제였습니다. 다행히 그래도 제가 인복은 있어서 한국여행사 사장님 두분 모두 체크를 받아주신다고 해서 체크로 비행기표을 구입해서 무사히 한국으로 갈수 있었습니다.
두어달 정도 한국에서 보내던 중에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델리로 돌아오자마자 영전에 꽃을 바치고 평강을 기원했습니다.
락다운으로 집 주변만 돌곤 했을 때, 그분의 집을 지나치곤 하면서 모한 할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함께 한 시간은 2년 정도 밖에 안되지만, 당시 거의 매일 마주치다 보니 아주 오랜 인연으로 생각됩니다.
옆집 리나가 매년 이맘때쯤이면 나누는 인도 특별식... 기름지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 1년간 빈 집으로 있다가 최근 집이 팔려서 새로운 집주인이 전면 개조하고 있습니다. 새 집으로 단장되고 새주인이 입주하더라도, 모한 할아버지의 생각은 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락다운도 풀리고 마스크도 안한 예전의 똘망한 눈망울의 아이들을 보면서 이웃 할아버지의 생각이 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