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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일라 Oct 28. 2022

#공황장애 + 임신

2년 가까이 둘째를 가지려고 마음을 열고 기다려봤지만 허니문 베이비였던 첫째처럼 금방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한 30% 정도 긍정적인 마음, 남편은 한 80% 정도 둘째에 대한 의지가 있었기에 될 대로 대라, 생명을 갖는다는 게 그렇게 인간의 의지로만 될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꽤나 조바심도 낫었다.

결국 안 가지겠다고 마음을 먹고 남편과 합의를 본 3일 후 나는 둘째를 임신했다고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얼마 되지 않아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안 보이는 순간들이 다시 찾아왔다. 마치 내 몸과 마음이 제어를 잃고 달려가는 차에 묶여 있는 듯 중심을 잡을 수 없이 여러 생각들이 뭉터기가 되어 빙글빙글 돌았다. 분명 세상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 칭할 수 있을 만큼 숭고한 생명을 가지는 일은 다양한 감정의 얼굴을 가진 연극의 신과 같이 나를 다뤄준다. 기쁨과 황홀은 지나면 걱정과 불안, 그리고 끝내 내 절대적인 우울의 기질 가운데 내내 쌓아온 여러 정신과 관련된 증상 중 하나인 공황이 또 찾아왔다. 문제는 아이가 없었을 때는 운동으로, 사교모임으로, 와인 1병으로, 일로 막아냈던 이 증상이 아이에게 가장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직 세돌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자그마한 실수에도 나의 호르몬과 아픈 정신은 컨트롤을 잃고 화를 내고 있었다. 남편에게는 더욱 서운했고, 별거 아님에도 서운했고, 그리고 또 서운했다. 보건소에서 임산부 심리상태 검사에서 나는 매우 우울하다는 결과를 받았고, 마침 있던 정신건강 복지 사업 덕분에 나는 심리 상담을 저렴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육퇴 후 맥주 한 잔은 많은 육아인들이 찬양하는 바이지만, 건강을 다시 되찾아보고자 할 때 나는 스파클링 워터를 주문한다. 레몬도 주문해 놓고,  반을 잘라 쭈욱 짜 넣고 있다면 민트나 딜, 로즈마리 등의 허브도 넣어 향을 입혀준다. 남편이 등 운동한다고 매달아 놓은 문 사이 철봉에 정말 5초라도 매달려보며 아이를 안니라 굽은 어깨를 펴 보도록 한다.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가는 나의 거북목을 위해 목을 펴주는 베개에도 10분가량 누워있는다. 아로마 오일을 인중에 살짝 발라주어 더 이상 향수와 남남이 된 나에게 여유를 줘본다.


준비물: 레몬, 스파클링 워터, 허브




10살쯤부터 한 달에 한 번은 꾸었던 꿈속에서 항상 나는 머리만 잘려서 유리통에 들어있는 예언가였다.

세상이 멸망한 후 모든 인류는 한 빌딩에서 살았고, 나는 예언을 할 수 있기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소유하여 맨 옥상층에 놓여 머리만 남긴 채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다. 그 감옥을 빠져나가기 위해 눈알을 굴리는 동력까지 이용하여 유리통을 깨트린 후 굴러가다 옥상 밖으로 떨어질 수 있었는데, 꿈에서도 나는 나의 이름을 외쳐야 깰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생각나지가 않는 것이다! 이 꿈은 적어도 3년은 꾸었던 거 같은데, 요새 비슷끄무리한 줄거리를 가진 영화가 꽤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린 나이에 왜 이런 꿈을 꾸었던 건지는 성인이 된 후에도 의아했는데, 거의 활자중독이 있던 내가 닥치는 대로 읽으며 어른들이나 읽는 책도 읽었던 게 문제였나 싶기도 하다. 지극히 K-장녀로 자란 나는 두 동생에게 부모의 노릇을 해 주어야 된다는 교육을 받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며 동생들이 잘못을 할 때마다 나는 나의 못난 점들을 눈물과 함께 고해하며 잘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K-가스 라이팅은 어린아이들에게 어른스러움은 곧 효도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어른인 척을 즐겨했던 나는 진짜 어른이 돼서도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남이 나를 아프게 할 때도 내가 잘못이 있어 그렇다고 나를 나무라기만 했다. 왜 더 버티지 못해, 왜 더 의젓한 엄마가 될 수 없는 거야? 저 엄마는 모든 걸 다 하는 걸? 왜 더 아이들을 잘 키우지 못하고, 왜 넌 더 집안일을 능숙히 못하는 거지?



'그래도 둘째 생기니까 좋지? 너 은근히 딸 바보드라'

잠을 못 자던 첫 애 육아 때 나의 모습이 좀 많이 티가 낫었나 보다. 첫 아이의 주수가 가득 찼을 때, 당시 미국에 닥터 헬렌 왕의 말을 빗대자면 1%(40주에 역아의 확률) 정도의 확률로 갑자기 아이가 180도 돌아서 역아가 되어버렸다. 다른 방도 없이 나는 응급 제왕수술을 해야 했고, 40주 내내 별다른 문제가 없이 자연분만을 꿈꾸며 스쿼트를 100개씩 했던 나는 굉장한 산후 블루스를 겪게 되었다. 4개월의 상담을 통해 난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위해 나를 준비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어린 나를 다시 마주 할 수 있었다. 다 내가 잘못한 거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아이를 잠시나마 안아줄 수 있었고, 아니야- 그래도 넌 사랑받고 있단다..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또 잊고 다시 구석으로 그 아이가 도망갈 수 도 있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있으니 버틸 수 있으리라 싶다. 그리고 점점 자라서 30대 후반의 나와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둘째라 아기가 이쁠까, 아들을 가진 내가 딸을 가져서 그렇게 이쁠까.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을 터인데, 무엇보다도 이번엔 다른 딸아이를 더 많이 안아주었어서 나에게 생긴 한뭉큼의 더 싱싱한 사랑인가 보다.

치유 엄마, 당신도 참 귀여운 아이였드만요- 곧 또 안아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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