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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Aug 20. 2018

흘려보내서는 안 될 소녀들의 이야기 <흐르는 편지>

이 책을 어떻게 써야 할까. 읽을 분량이 점점 줄어들수록 걱정은 늘어만 갔다.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임은 알지만 접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아파 피하고만 싶은 이야기. '위안부' 문제는 수없이 접해도 전혀 무뎌지지 않는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를 살았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시대를 조금 더 일찍 살았던 소녀들의 이야기. 그분들의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임을 알기에 '위안부'와 관련된 책은 늘 한숨을 크게 들이쉬며 첫 장을 펼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잊기 않기 위해 누군가는 집회에 참석하고, 누군가는 영상을 남긴다. 김숨 작가는 2016년에 <한 명>이라는 작품에 이어 <흐르는 편지>로 그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곱디고운 십 대 소녀였던 그녀들의 처절한 이야기를 눈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받아들여 짧은 글로 토해내며 기억한다.


금자 또는 후유코는 열다섯 살이다. 열세 살 되던 해 비단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나섰지만 그녀가 도착한 곳은 세계 위안소였다. 어리고 곱고 가녀린 열세 살의 소녀는 그렇게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다. <흐르는 편지>는 낙원위안소에서 살아가는 금자와 다른 소녀들의 처절한 일상을 담담히 들려준다. 열다섯 살이 된 금자는 매일 아침 흐르는 물에 군용 콘돔인 삿쿠를 씻는다. 그리고 엄마에게 편지를 쓴다. 소녀는 글자를 모른다. 물론 엄마도 글자를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흐르는 물로 부치는 편지는 글자를 몰라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저어가며 쓰는 편지는 강물과 함께 금세 사라져 버린다. 알지만 책을 읽는 내내 금자의 마음을 담은 편지들이 물을 타고 흘러 흘러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엄마에게 닿기를 바랐다. 


누구의 아기인지도 모를 아기를 가졌다. 배가 부른 후에도 소녀는 일본군을 받았다. 제3자의 눈이 아닌 '나'가 들려주는 낙원 위안소의 낮과 밤의 생활은 읽는 내내 자꾸만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금자의 표현들은 담담해서 더욱 슬프고 처절했다. 

그 애는 겨우 열세 살로 내 아래 여동생과 나이가 같다. 이곳은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 있을 만한 데가 아니다. 열다섯 살 짜리 여자애가 있을 만한 데도 아니라는 걸 오지상과 군인들만 모른다. 열다섯 살인 나도 아는 걸. 

<흐르는 편지>는 위안부 문제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금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녀의 눈을 통해 다른 소녀들의 생활과 고통, 죽음을 함께 느낀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 속, 타국에서 매일 겪는 고통스러운 일,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겨우 십 대의 소녀들은 어떻게 살아냈을까. 문득 작년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속 소녀들처럼 <흐르는 편지> 속 여자애들도 집으로 돌아갈 꿈을 꾼다. 


3월 10일 육군 기념일에 오지상을 우리를 마당에 모아놓고 말했다. "너희는 천황폐하가 일본 군인들에게 내린 하사품이다." 천황은 어째서 일본 여자애들이 아니라 조선 여자애들을 하사품으로 내려주었을까. 낙원 위안소에 일본 여자애는 없다. 세계 위안소에도 일본 여자애는 없었다. 전쟁은 일본 군인들이 하는데. 오지상은 이렇게도 말했다. "너희 한 명이 군인을 백 명씩 상대해야 한다." 군인을 백 명은커녕 열 명도, 단 한 명도 상대해보지 않은 오지상은 군인을 상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흐르는 편지>는 엄마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쓰는 것으로 시작하고 아기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편지로 끝을 맺는다. 소녀는 엄마에게 전해지지 않을 질문을 한다. "어머니, 오늘 밤 나는 아기를 나을지도 몰라요. 닭띠 아기를요. 어머니, 그런데 나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요.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먼 데까지 끌려와 조센삐가 되었을까요." 

초경을 시작하기도 전,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도 몰랐던 열세 살의 소녀는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무슨 잘못을 했길래 먼 타국에서 치욕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걸까. 이야기는 고통스러운 매일을 이겨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금자 스스로를 달래는 일기와도 같았다. 

기억하기 위해 <흐르는 편지>를 읽어야 한다. 외면하면 잊어버리고 만다.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위안부 소녀였던 할머니들 한 분, 두 분 하늘의 별이 되어간다. 생존하시는 분들이 없다고 위안부 문제가 사라지는 걸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흐르는 편지>를 읽으며 나는 금자라고 불리던 예쁜 소녀의 열세 살과 열 다섯 살을 함께 했다. 책을 읽을 때 느끼는 불편함, 관련된 영화를 보며 내려앉는 무거움이 싫어서 위안부 문제를 피해서는 안된다.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소녀가 흐르는 물에 마음을 담아 써 내려간 편지를 흘려보내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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