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처녀작 '이방인'을 읽고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않는 모든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 알베르 카뮈
카뮈의 처녀작 이방인, 책을 읽고 나서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책갈피 해놨던 부분을 두번 세번 읽고 남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검색이 가능한 리뷰를 모조리 읽어봤다. 이방인의 특정 부분은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캐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렇다면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정말로 옳지 않은 것이 맞는지에 대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모든 위대한 소설이 그러하듯 이방인의 첫 문장도 상당히 특이하다. 개인적으로 위대한 게츠비 소설의 첫 문장을 좋아하는데 카뮈 역시 소설 속 첫 문장을 시작하기 앞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저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주인공은 어머니와 원수 지간이었나. 아니면, 그가 어머니를 죽인 것일까. 첫 문장만으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장시간 버스를 타고 장례식 장에 도착한 그는 심지어 죽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날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사랑을 나눈다. 지극히 본인의 감정에 충실한 주인공 뫼르소. 독자로서 그의 행동을 이해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람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모든 삶이 어쨌든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법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삶도 내게는 전혀 싫지 않아요.
알제리에서 일하는 그에게 파리로 1년간 파견 근무를 권유하는 사장. 삶에 변화를 주는 데 큰 관심이 없냐고 묻는 사장을 향해 그는 위와 같이 말한다. 주인공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소설을 읽으며 처음으로 공감했던 문장이다. 개별 구성원의 가치와 생각을 존중해주는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그런 사회 아닌가. 그게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고 있지 않았던가. 왜 우리는 남들이 생각하는대로, 사회적 통념에 맞춰서 살아가야 하느나 것인지. 인생은 결국 혼자 살아야 하며 결정 역시 누군가에 기댈 수 없는 일이다.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을 거면서 이래저래 훈수를 두는 일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솔직한 감정은 여자친구에게 하는 행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여자친구 마리는 그에게 찾아와 자기와 결혼하고 싶은지를 묻는다. 여자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서인데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결혼을 너가 원하면 할 수 있는데 굳이 안해도 상관은 없어. 결혼을 요구하는 건 너니까 그저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만족해.
만약 당신이 뫼르소의 여자친구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마리는 만약에 다른 여자가 같은 질문을 해도 동일하게 대답할 것이냐고 묻자 그는 그러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리는 뫼르소를 사랑하는데 정작 뫼르소를 그 점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혼잣말을 한다. 그녀가 불쌍했다. 만약 내가 그녀의 친오빠라면 당장 헤어지라고 말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뫼르소의 치명적인 매력이 무엇이길래 그녀가 이렇게 매달리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친구가 많지 않다보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레몽과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탐탁게 생각치 않는 아랍인들과 시비가 붙는다. 그런 일이 벌어진 뒤 혼자 해변을 거닐게 되는데 시비가 붙었던 아랍인과 마주치게 되고, 상대방이 꺼낸 칼에 무의식적으로 총을 난사하게 된다.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것도 성격이 나쁜 살인. 총 한발이 아닌 4~5발의 총알을 난사했다. 그는 재판에 넘겨진다. 예심 과정에서 판사는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궁한다. 그리고 살인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더욱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형이라는 선고가 내려진다.
읽으면서 조금 불편했다.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판사는 그를 무시하고 경멸한다. 꼭 종교 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는 당연시되는 통념들이 있다. 결혼, 취업, 대학, 육아 등등 남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기란 스트레스로 인해 병에 걸릴 정도다.
내 운명이 내 의견의 반영 없이
처분되고 있었다.
이방인의 재판을 보며 단지 소설 속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도 행해지고 있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살인을 한 것은 잘못한 게 맞고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재판은 이미 답이 정해진 상태에서 정작 당사자의 생각은 무시된 채 진행이 된다. 증인들이 그의 평소 행동들을 증언해도 무시된다. 그는 결국 그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는 이전에도 옳았고 여전히 옳고, 언제나 옳아. 난 이런 식으로 살았어. 아마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테지.(중략) 다른 사람들의 죽음, 엄마에 대한 사랑이 다 무슨 소용이야. 당신이 말하는 신, 사람들이 선택하는 저마다의 삶, 그들이 고른 운명이 이런들 어떻게 저런들 뭐가 중요할까. (중략) 모든 사람이 다 특권자야. 특권자들만 있어.
이방인이라는 소설의 클라이맥스가 아닌가 싶다. 소설을 해석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난 여전히 소설의 요지가 뭔지 모르겠다. 이번 주 독서 토론의 발제 도서가 바로 이방인이다. 얘기를 나누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