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 최은영
#밝은밤
증조 할머니, 할머니, 엄마, 우리네 근현대사를 날 몸뚱이로 버틴 이들의 질곡이 빼곡히 담겼다. 모질어도 이렇게 모질 수 있을까 싶은 시대와 사상, 이 날카로운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낸 여자들의 이야기. 대를 이어 파생된 슬픔 고통의 파편은 딸들에게 튀기도 하고, 모양은 다르지만 비슷한 아픔으로 딸에게 주변 여성들에게 대물림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 모든 경험을 함께 나누고 함께 일으켜 세운다. 고통을 주면서도 고통을 함께 하는, 세상 제일 복잡하고 짙은 사랑의 서사.
마침 이 시기에 이 책을 만난 건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사과 받지 못한 지연의 상처에 천착하여 작품을 읽었다.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도망친 시간 동안 내가 나에게 가한 기만. 지연처럼 나 역시 이 이유 때문에 더 오래 더 깊이 고통스러울 것임을,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한 인간에게 무모하게 건 조건 없는 신의, 지독하게도 포기가 안되던 희망이, 결국 내 기만이었다는 것. 나는 그렇게 나를 방치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책이 향하는 방향처럼, 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로지 이 고통을 포함한 내 마음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방법 뿐이겠지. 잘 들리지 않는 어떤 희미한 소리를 찾듯 사력을 다해, 온 정신을 모아서. 다만 새비처럼, 삼천이처럼, 명숙 할마이처럼, 무엇보다 이번만큼은 스스로에게 이런 이들처럼 다정한 존재가 되어주겠다 다짐한다. 아픔이 잦아들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어떻게 이런 시기에 이 책을 읽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다. 어떤 다정한 우주의 섭리, 내 인지력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경이로운 우연의 순간이었다. 적어도 내겐, 아름다움을 넘어선 마법같은 문장들이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리가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저도 사과받지 못했어요.”
“그는 나를 향한 감정의 회로가 차단된 사람처럼 보였다. 내 감정을 하나하나 풀어 그에게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통하지 않았다. 거기서 끝내야 하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다시 그 문제로부터 도망쳤다.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체념했다. …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는 어머니가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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