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병 강아지와 함께 살아내기
있지, 새벽아.
엄마가 어렸을 때 파주 할머니(내 엄마)는 종종 술에 취해서는 엄마(나)를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자식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어. 그런데 엄마는 그게 너무 싫었어. 할머니가 술에 취한 것도 싫었고, 할머니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돌아서면 엄마에게 짜증만 내고 웃는 얼굴 보여 준 적이 별로 없었거든. 물론 할머니의 삶이 너무 팍팍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여전히 원망스럽지만 이해는 해.
아무튼 그래서 네게 이런 글을 쓰는 엄마 자신이 우습고 부끄러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아. 내가 내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세상 사람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거든.
사람들은 '자식 같은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을 자주 써. 엄마도 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너를 내 자식과 다름없는 존재라고 소개하곤 하지. 하지만 실은 그 표현이 너무 무례하고 모욕적이라 생각해. 난 단 한 번도 널 자식'처럼' 키운 적 없어. 비록 우리는 종이 다른 동물이고, 넌 나의 글을 영원히 읽을 수 없지만 그래도 넌 내 딸이야, 자식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엄마랑 같이 극단 연습실에 자주 갔던 때를 기억하지? 연극 연습이 끝나고 나면 엄마가 새벽이 안고 많이 울었잖아. 그때 연습 중이던 공연, <크라켄을 만난다면>은 주인공이 자식의 죽음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내용이었거든. 주인공의 딸이 죽게 될 것을 알게 되는 그 장면은 몇 번을 봐도 미칠 것 같았어.
왜냐고? 알잖아, 엄마는 자식 둘이나 먼저 보내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거. 종이 다른 동물을 반려하는 사람들의 비극이지. 우리는 반드시 자식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어리석게도 그 선택을 하는 순간에는 그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하지. 누군가 지금 내 과거의 선택을 하려 한다면 되도록 말리고 싶어.
엄마는 누군가의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심하게 다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아. 심지어는 오열을 할 때도 있지. 그런 엄마를 보고 사람들은 '정작 자식도 없는 사람'이 왜 그렇게 우냐며 울지 말라고 위로를 해줘. 그럼 엄마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고 눈물을 닦아. 내겐 수년, 혹은 수개월 안에 먼저 세상을 떠날 자식이 둘이나 있다는 말은 내 가슴속에만 담지.
파주 할머니는 술에 취하면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어. 엄만 그게 술주정 같아서 너무 싫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나는 너만 보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사랑해, 사랑해, 우리 딸 엄마가 너무 사랑해.
내 심장을, 내 숨을, 내 목숨을 다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내 사랑아. 엄마 딸 해줘서 너무 고마워. 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