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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3시간전

열두 번째: 마지막을 준비하(지 않)기

심장병 강아지와 함께 살아내기

새벽이의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글을 쓰는 간격이 점점 늘어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새벽이의 상태가 아주 양호했기 때문이다. 400일 넘는 기간 동안 아이는 큰 탈 없이 숨을 쉬어 주었고 내 마음은 안정을 찾아 행복하기까지 했다. 심장병을 가진 강아지와 살아'낸다'는 느낌을 상기할 때가 별로 없었다. 그동안 새벽이는 내게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 새벽이었다.


그래도 새벽이의 병세는 차츰 악화하고 있기는 하다. 더디지만 심장은 조금씩 그 기능을 잃고 있고 아이가 저산소증으로 실신하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잠시 정신을 잃더니 다음 번에는 몸이 경직되었고, 그 다음에는 소변을 봤고, 그 다음에는 발작을 했다.


다시 강심제를 늘렸다. 늘린 직후에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오늘 아침 또 쓰러졌다. 이번에는 뭔가 괴로운지 포복 자세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한순간에 넘어갔다. 다행히 정신은 잃지 않았고 금세 기운을 차렸다. 아이가 실신하는 일은 그 자체로 내게 걱정과 고통을 남긴다. 하지만 더 마음이 쓰이는 부분은 아이가 쓰러지는 이유가 모두 '기쁨' 때문이라는 점이다.


가장 슬펐던 기쁨은 오랜만에 집에 온 남편을 보고 새벽이가 기절했던 일이다. 자주 보지 못하는 아빠를 반기다가 쓰러질 것을 염려해 품에 안고 있었다. 품에 안고 있으면 최소한 격하게 뛰다가 쓰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벽이는 품에서 남편을 반가워하는 그 마음만으로도 벅찼는지 그대로 힘을 잃었다.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우리 가족에게 이보다 사랑스럽고 아픈 일이 또 있을까.

산소방에서 꺼내 달라고 애원하는 새벽이

평균적으로 진행되는 속도보다 훨씬 느리게 악화하는 새벽이의 심장 상태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결국에 끝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는 심장병의 악화가 가속도를 타고 갑자기 이별을 맞이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새벽이가 없을 세상을 다시 상상해봤다. 나는 살 수 있을까? 남편은 견딜 수 있을까? 미르는 그 상황을 이해할까? 다양한 질문이 떠올랐지만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마치 내 마음이 갈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모든 생명의 끝은 죽음이다. 아무리 슬퍼하고 부정해도 바꿀 수 없는, 언제나 참인 명제다. 나는 반드시 도래할 이 명제 앞에서 잠식되지 않기로 했다. 새벽이의 죽음을 걱정하는 일은 모순적이게도 새벽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 수 밖에 없는, 그러나 언제일지 정확히 모를 미래를 우려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려 한다.


오늘은 새벽이가 밥을 잘 먹었다. 잠도 잘 잤고 내가 없는 집에서도 아무 일 없이 있었다. 내일도 규칙적으로 약을 먹이고 영양제 복용량을 늘려 보려 한다. 토요일에는 동물병원에 가서 주치의 선생님께 궁금한 점을 질문하고 앞으로 새벽이를 어떻게 돌볼지에 관해 다시 고민할 예정이다.


이렇게 짧은 호흡으로 나아가며 새벽이와의 이별을 준비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

이 글은 약 200일 전에 작성했습니다. 현재 새벽이는 강심제를 더 늘린 후로는 실신도 없이 더 잘 지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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