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여권 사진의 여권 말고도 그 이후에 발급받았을 여권 여러 개와 88 올림픽 자원봉사 출입증,
군사정치 시절 대통령의 이름이 박힌 알 수 없는 메달들이 더 나왔다.
내가 지금 격동의 80년대에 와 있는 것인가 싶어 색다르고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지금은 하얗게 세 버린 백발의 반 삭발 머리를 하고 하루 종일 안방 침대에 누워 멍한 눈으로 역사채널 티비만 보는, 다리에 힘이 빠져 지팡이 없인 걷지도 못하는 "늙은 사람"이 되어버린 아빠를 바라보니 마음 한편이 무겁고 쓸쓸해졌다.
내가 중학교 올라가던 14살 2월, 엄마와 재혼을 해서 만난 아빠는, 베트남 전쟁에 중동 건설역군으로 일하며 나라에 젊음을 바쳐 일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고, 그 시절의 아빠답게 지독히 가부장적이고 다른 사람 말은 귀에 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활달하고 먹고살기 힘들어 빠득빠득 사느라 성격이 급하고 조금은 입이 험했던 엄마는 당신이 제일 교양 있고 내가 아는 게 상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아빠와 자주 갈등했고, 그걸 지켜봐야 했던 사춘기의 딸은 아빠에게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도 노골적으로 아빠를 피했던 것 같다. 아빠가 집에 오면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밥도 같이 먹지 않으려고 먼저 먹거나 나중에 먹었다.
내가 먼저 아빠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아빠는 알고 있었겠지
그래도 내색하지 않았겠지
그때의 아빠들은 그랬으니까.
내가 마흔이 되는 동안 아빠는 팔순을 바라보고 있다.
나의 인생이 결실을 맺고 어떤 식으로든 영글어 가는 동안 아빠는 인생은 볕 하나 없는 밤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서로의 거리에 쌓인 세월의 두께가 너무도 두꺼워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세월의 두께에 약간의 온기는 남아있던 모양이다.
치매의 전 단계에서 기억을 놓지 않으려고 위태롭게 버티는 아빠가 안쓰럽고 가끔씩 심장질환으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단 이야기를 들으면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는다.
아빠도 살갑고 다정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다 이제는 나에게 먼저 전화해 아이들이 보고 싶다며 집에 언제 올 거냐 찾으시기도 하고, 친정에 가서 아빠를 찾지 않고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있으면 서운해하시며 감정표현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평생 살아온 모습과 달라지는 아빠의 모습에 엄마는 치매가 멀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지만 난 아빠의 이런 직접적인 표현이 나쁘지 않고, 살짝 반갑기도 하다.
우리 사이의 작은 온기로 남은 아빠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비춰줬으면.
78년의 여권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때의 아빠는 당신 인생이 이렇게 슬프게 저물어 갈 줄 몰랐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