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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배 Apr 02. 2024

감자는 감자일 뿐

누구나 싹튼 감자는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요.

주말농장이나 텃밭을 시작하게 되면 제일 먼저 시작하게 되는 작물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감자가 아닐까.

90일~100일 동안 자라고 장마가 오기 전에 수확해야 하는 하지감자는 자라는 시기를 확보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른 봄에 심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그 유명한 씨감자다.


개인이 하는 텃밭이라면 2월에 질 좋고 튼튼한 씨감자를 사서 싹을 틔워 심을 테지만

학교라는 특수한 배경 덕에 학교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 학부모 동아리가 학교 예산을 사용하기에는 이러쿵저러쿵 여간 번거로운 일이라 2월은 그저 흘려보내고, 3월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랐다.

3월에 심고자 하여 새 학기에 맞춰 밭도 갈아놨지만, 학교 예산을 신청하는 시기는 애매해져 버렸고,

밭은 흙먼지를 날리며, 뭔가가 심어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이 텃밭에 감자가 풍년이 들게 하여, 700명의 전교생을 배불리 먹일 수는 애당초 목표로 삼지도 않았고,

그저 아이들이 오며 가며 감자는 이렇게 자라는구나.

감자꽃이 이렇게 하얗고 귀엽게 예쁘구나

감자잎이 누렇게 변하면 그때 감자를 캐면 되는구나.

하는 것을 직접 보게 하자는 의미가 제일 크기에 동아리 회원들 간에 협의를 마쳤다.


누구 하나 집에 싹튼 감자는 하나씩 가지고 있잖아요?


먹으려고 샀던 감자의 존재감을 잊고, 구석에서 조용히 몇 주 혹은 몇 달간 동거동락하던 그 감자들.

어느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세월을 혼자 정통으로 맞은 듯 주름투성이로 남아있는 영양분을 싹으로 전부 밀어낸 쪼글이 감자들.

엄마들이 모인 동아리라 그런 감자를 공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함에 앞서, 작년에도 그러했듯 조급증과 불안증이 도져 블로그와 유튜브로 <집에서 싹튼 감자 심어도 되나요> 연신 검색해 본다.

검색해 본 결과는 부정적이다.

종자를 위한 것이 아닌 식재료로 산 감자에 싹을 틔워 심으면 수확량이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아는 게 병이라, 불안증이 더 커져만 갔다.

이러다 아이들이 체험할 감자도 안 자라면 어쩌지?

싹이 올라오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면 어쩌지?

고민과 시름이 깊어져 무거운 한숨이 쏟아진다.


우리가 이 감자를 시장에 내다 팔 것도 아니고, 되는데로 심어나 보자.

이번에 감자가 잘 되지 않는다면 내년엔 씨감자를 사서 심으면 된다.

올해는 집 감자가 잘 되는지 연구하는 일년이 되어보자.

누군가의 가벼운 한마디가 나의 무거웠던 마음을 가뿐하게 해주었다.


감자는 감자일 뿐.


그렇게 집에서 삼삼오오 가져온,

덥수룩한 머리처럼 싹이 자란 감자들을

엄마들이 함께 모여 잘 갈아진 텃밭에 토닥토닥 심어주었다.

그렇게 심고도 애나벨처럼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 감자가 남기도 했지만..


또 감자는 심어졌고,

감자는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올리며 자랄테다.

이제 남은 건 감자와 텃밭의 흙이 서로 얼마나 돈독해지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고민하고 안달하고 복달하고 수선을 피운들,감자의 순이 올라오는 그 거대한 우주의 법칙은 어찌하지 못하는 법이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곤 감자의 싹이 좀 더 힘을 낼 수 있도록 적당한 시기에 약간의 비료를 얹어주는 일 정도가 아닐까.

그리고 약간보다 더 큰 응원의 마음?


감자는 감자 일뿐.


내가 해결 할수 없는 일에 요란하게 수선떨지 말고,

때로는 조용히 지켜보며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단 인생의 법칙을

텃밭을 가꾸며 또 한번 배운다.


산뜻한 마음으로 기다려야지.

조만간 만나게 될 감자의 초록 새싹을 기대하며-

봄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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