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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배 Apr 15. 2021

나의 분홍색 흉터

옷을 갈아입다 중심을 못 잡고 그만 옆으로 넘어졌다.
그러다 옆에 있던 박스 귀퉁이에 종아리를 쓸리면서 작은 상처가 났는데, 그때부터 나의 건선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상처가 잘 낫지 않고 오래도 간다 싶었는데 상처의 모양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딱지가 앉는것도 아니고 비늘이 덮힌 것처럼 각질이 생기더니 점점 옆으로 넓게 퍼져 갔다. 그제서야 이게 뭐지 싶어 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무덤덤하게 건선 같다며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해줄 뿐이었다.
그땐 나이도 어리고 건선이 뭔지도 몰랐기에 나 역시 무덤덤하게 연고를 발랐고, 몇 달 뒤엔 깨끗해져 있었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그 만큼 힘든 육아를 힘들다 느낄새도 없게 열심히 아이를 키웠다. 내 면역력은 바닥으로 치닿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열이 났다. 몸살이 심하게 와 약으로도 낳질 않아, 병원에서 링겔까지 맞고 나서야 겨우겨우 나았다.
그리고 몇 년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건선이 옆구리와 허벅지에 생겨났다. 이번엔 붉은 반점으로.
시작은 작은 점처럼 생겨 이러다 없어지겠지 하고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다가 산불 번지듯 점점 커지면서 번져가는 병변에 무섭고 당황스러워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 땐 이미 동네 피부과에서 처방받은 연고도 전혀 듣질 않는 상태였다.
비싼 피부 전문 한의원도 찾아가고 적외선 치료도 시작했다. 보습이 중요하다고 해서 좋다는 바디로션도 바르고, 소금물로 목욕하는게 도움이 된다고 해 천일염을 사서 목욕할때마다 소금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오는것이던가. 빠르게 번지던 속도에 비해 나아지는 속도는 너무도 미미하여 맘은 조급해져만 가 스트레스가 더 쌓였다. 이미 옆구리와 허벅지는 건선이 퍼질데로 퍼져 언뜻 보면 화상이라도 입은 듯 흉한 붉은색이 나를 덮어갔고, 그보다 더 흉하고 참담한 절망감도 내맘을 깊이 덮어왔다.

대중탕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후로 더 몸을 사리게 되어 목욕탕이나 수영장은 얼씬도 하지 못했고,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번져 내려온 병변에 더운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못했다.
나 조차 쳐다도 보기 싫은 이 상처들을 평생 함께하자고 맹세한 남편에게도, 내속에서 열달을 자라 세상에 나온 나의 아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 흉이 있는 살을 그대로 도려내고도 싶었고, 세상에서 그냥 사라지고도 싶었다. 나의 이 흉한 병이 혹시나 내 아이에게 유전이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우울감은 계속계속 깊어져만 갔다.
하지만 나의 우울과는 관계없이 나의 딸은 예쁘게 자라고 있었고,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였다.
아이를 씻기려고 어쩔수없이 바지를 걷어올리고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 아이를 씻기고, 물기를 닦고 로션을 발라주는데 아이가 나의 흉을 한참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흉인데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니 마음이 급해져 로션바르는 손이 바빠지는 찰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엄마 다리에 상처가 분홍색이네, 엄마는 상처도 분홍색이라 예쁘다.”

그동안 나의 흉을 본 사람들은 '어우, 이렇게 심하단 말이야?' 하는 잠깐의 혐오가 담긴 놀란 눈빛과 이어지는 뻔한 위로를 해주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나는 회복에 대한 자신감도 잃어갔고, 완치 없이 평생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절망감이 깊을데로 깊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순수한 위로가 너무나 쉽게 나를 우울의 바다에서 건져주었다. 한창 공주와 보석과 왕관과 핑크색에 꽂힌 3살 아이의 눈에 나의 흉은 그저 예쁜 분홍색이었을 뿐이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이의 말 한마디에 더 이상 흉해보이지 않았다. 예쁜 분홍색 꽃이 내몸에 피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의 한마디가 어떤 연고보다, 어떤 로션보다 좋은 치료제가 되어 나의 마음까지 치료해 주었다.

그 후로 비록 흉터가 하루아침에 씻은듯이 나은건 아니었지만, 수치감으로 가득하던 우울의 늪에서는 벗어날수 있었다.
나의 흉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도 더 이상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어들어가지 않고, 당당하게 난 이런 질병을 앓고 있다고 말할수 있게 되었다.
자해에 가까웠던 우울감이 사라지자, 내 안에서도 자생력을 찾는 것 같았다. 그동안 열심히 해오던 치료들이 빛을 발하던 것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더이상 움추려드는 마음이 없어지자 흉들도 점점 옅어져 예전의 살색을 되찾았다.

건선이란 병은 원인도 뚜렷하지 않고,  특별한 치료법도 없는 만성질환이다.
나도 완치가 되었다고는 볼수 없다. 둘째를 낳고 또 한번 건선으로 온몸이 뒤덮혔었고, 또 병원을 밥먹듯이 들락거렸지만 우울한 마음까지 나를 뒤덮게 만들진 않았다. 조급한 마음 없이 건강한 마음으로 지내다 보면, 어느새 상처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도 종종 잊을만하면 한번씩 붉은반점이 생겨나지만 더 이상 심장이 덜컥 내려 앉지 않는다.
오래는 걸리겠지만 언젠간 나아질거란 믿음으로, 나의 분홍색 상처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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