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의 대물림
시골 부모님 집수리를 마치고 올라온 큰오빠가 대뜸 나를 보자마자 한다는 첫 말이 부모님께 전화 좀 자주 하지 말란 말이었다.
아니 전활 자주 하란 것도 아니고... 전화를 일주일이나 삼일에 한번 정도로 줄이는 건 어떻겠냐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오빠에게 괜스레 짜증이 올라왔다. 사실 오빠보다 아버지에게 내고 싶은 화였는데... 오빠에게 미안했다.
"전화 안 한다고 성화하실 땐 언제고.
아버지 대체 와 그라 시노?" 혼잣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마도 아버지가 딱히 할 말도 없으신데, 막내딸이 조석으로 전화해서 뭐하시냐?, 기분은 좀 어떠시냐?, 식사는 하셨냐?, 아픈 곳은 좀 어떠냐?, 밤새 잘 주무셨냐? 앵무새 마냥 똑같은 말만 늘 되풀이해서 묻는 것에 답하는 것이 힘드셨나 보다.
변화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아버지 자신의 일상을 말하시는 게 싫으신 거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니 지레짐작만 할 뿐.
아버지께 직접 불편한 게 뭔지 여쭙지 않았으니 아버지 심중을 알 길은 없다.
오빠 말을 들은 터라 전화 횟수를 조절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마치신 아버지의 눈 상태가 궁금해 결국 전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요 며칠 아버지는 상당히 화가 나 계셨다. 한쪽 눈 수술을 마치고는 화가 조금 가라앉으신 듯도 했었지만... 아버지의 전화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하자 왠지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런데 다행히도 수화기 너머 들리는 아버지 음성은 왠지 자포자기한 것처럼 기운 빠진 노인네 목소리다. 일단 화를 안 내니 덜 무섭다.
모른 척 그냥 넘어갈까 하다 아버지 맘이 궁금해서 다른 이야기 끝에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언짢으시냐 물었더니 열 받을 일 투성이라 화가 너무 난다고 얘기하신다.. 열 받으셨다면 금세 전화를 끊어버리시겠다 생각했는데, 내 추측은 빗나갔다.
그때부터 아버지께서 숨을 고르시는 듯하더니 끊일 듯 끊어지지 않고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얘기하기 시작하셨다.
내용인즉슨 읍내 나가실 때 우리 부모님께선 사이가 매우 매우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세트 메뉴처럼 함께 다니시는 이해 불가한 동행을 하시는데, 읍내에 도착하자마자 엄마가 곧바로 사라지셨단다. 백내장 수술을 했던 민들레 안과에 볼 일이 있던 아버지가 먼저 병원에 도착해 엄마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좀 있음 오겠지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자 아버지 주머니에 있던 돈을 탈탈 털어 계산을 마치고 안과를 나오셨단다. 버스 타기 직전 동네 가는 버스비 300원이 부족한 걸 알게 됐고, 결국 정류장 근처 약국에서 삼백 원을 빌리게 됐는데, 쩔쩔매며 아쉬운 소리를 하자니 그게 너무 열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잘 모른다. 아버지가 이만한 일로 열을 받을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걸 처음 알게 됐다.
나는 지금 나를 이해하기 위해, 내 어린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도 곁들여 시도하는 중에 있다.
"아!, 아버지 많이 당황하셨겠네요. 많이 힘드셨죠"
이렇게 접대성 멘트를 날려 드렸지만, 속으론 그만한 일로 화가 나는 내 아버지가 많이 실망스러웠다.
"아버지 많이 곤란하셨겠어요" 다시 맘에 없는 말을 뱉었다. 그 말이 맘에 드신건지 내가 자신을 공감한단 느낌이 드시기 시작한 건지 두 번째 화난 얘기를 꺼내 놓으신다.
아버지는 몇 해 전까지 11년 정도 동네 이장을 맡아보셨었는데, 그 이후로 주변 동네 이장을 하셨던 분들과의 모임에서 경로당 회장을 맡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다 보니 그 모임의 돈 관리를 직접 하시게 됐는데, 이번 시골집 집수리를 하면서 전직 이장님들의 회비를 모아 놓은 통장이 없어졌다는 거다. 밤새 그걸 찾느라 한숨도 못 주무시고 화가 나서 자살하고 싶으셨다고 말씀을 하셨다. 이 얘길 이렇게만 전하면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아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참고로 말하면 정말로 속상한 듯이 천천히 울먹이는 듯 말씀하셨다.
아니 통장이야 재발행하면 될걸 이천 원쯤 주면 재발행이 되는데, 이렇게 아버지께 말하고 나니 미안한 맘이 올라왔다.
얼마나 애간장을 끓이셨으면 통장분실 하나로 자살하고 싶으셨을지... 설마 하니 통장이 없으면 돈의 입출금 내역도 알 수 없고, 예금했던 돈을 증명할 길도 없다고 잘못 알고 계셔서 밤새 찾아내려 애쓰신 걸까? 제발 이것만은 아니길... 바라 보지만... 아마도 그 때문에 잠도 안 자고 통장 찾으려 혈안이 되신 걸지도...
아버지의 그때 그 마음을 느껴 보려 했으면 좋았겠지만.
순간 평가가 먼저 앞서고 뒤이어 곧바로 해결책을 알려주고 나니 아버지 마음을 못 받아 줬구나! 그제사 내식대로의 생각이 멈춰 섰다.
"아버지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에휴"
다시 빈말을 날리게 됐다.
내 안에 내가 말한다. "대체 아버지 당신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그만한 일에 목숨을 걸고 그러는 겁니까?, 정말 문제가 닥치면 어떻게 살아 내려고 그러는 건데요."
그런데 문득 갑자기 아~아아! 그래서 그토록 별 것 아닌 것에도 눈만 뜨면 화를 냈었던 건가?... 지금보다 젊던 아버지... 그 시절
시간만 있으면 입속으로 술을 들이붓고 있던 이유가 혹시...
왠지 아버지의 예전 행동들이 저절로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히는 순간 모든 실마리가 풀려 버리는 것처럼.
아버지가 충동조절장애나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안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안을 느끼는 사람, 과한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 두려움이 너무 많아 어떤 일이든 조바심이 나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면 분노를 터트리고, 자기 삶의 방식에서 조금만 빗겨 나도 두렵고 두려우니 화가 나고, 크게 소리 지르고, 악을 쓰게 되고, 악을 써도 주변이 자기 맘처럼 돌아가 주지만은 않으니 또다시 술의 힘을 빌어 주먹을 휘두르고 상을 뒤집어엎고,
아! 내가 너무 소설을 써대나. 아니 주말극장이면 좋겠지만 아버지의 행동은 언제나 다큐멘터리였었거든. 질리지도 않고, 항상 비슷한 다큐를 찍어 대던 울 아버지.
연세가 있으셔서 스스로 젊을 때와는 다른 무력해져만 가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어렵다 보니 화가 늘었나 보다 그렇게도 생각됐었는데, 아니면 치매 초기 이신건가? 왜 사사건건 화를 못내 죽은 조상이라도 있는 건지 연신 화를 내시는 걸까 의아 했었는데...
모든 의문이 스르륵 풀려 버렸다.
잘못짚은걸 수도 있지만.
노화 탓에 예민하게 되신 것뿐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이건 뭐지.
불쌍한 아버지...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내 아버지보다 더한 아버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어머니 밑에서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단한 삶이었길래 별것 아닌 작은 것에도 벌벌 떠는 주인 잃은 버려진 개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물 힘도 없으면서 겁에 질려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주인이 버린 지 아주 오래된 유기견을 닮은 아버지가 가엾고 가엾다.
부모님이 진심으로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 못지않게 상처 입은 나의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은 맘에 꾸역꾸역 전화를 걸어대는 나도 가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