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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사진을 탐색하다 / 권분자

산문

by 권작가
흑백사진을 탐하다.jpg


흑백사진을 탐색하다


권분자



한컷 사진이 안개로 인화되고 있는 뿌연 나무 아래

줄줄이 아이를 낳은 여자의 곁에서 찡그린 열세 살의 내가 들꽃을 꺾으며 돌아다니고 있다.

나무 둘레에 빼곡하게 자라는 들풀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식구들은 식어가는 감자를 먹으며

언제 끝날지 모를 할머니의 이야기에 땅을 손으로 치며 활짝 웃기도 한다.


이때, 살짝 들뜬 돗자리 틈새로

읍내 미용실 잡지책에서 찢어온 여인의 사진이 보인다.

사진에는 망사 옷 입은 여인들의 사생활이 숨겨져 있었다.

내 사진은 언제나 흑백이지만 소녀 적 꿈은 울긋불긋했으므로

그날 이후 나는 넘을 수 없는 종이의 벽에 갇혀버렸다.


그렇게 운명의 수레바퀴는 조용히 굴러 오늘의 내가 되었다.

내 눈길은 이리저리 흩어져서

바위를 짓누르는 꽃잎의 눈길로 추억을 더듬는다.

모든 것이 한낱 흑백사진 안에서 허탈하게 끝나버릴 수 있다는 걸

그날의 식구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풀냄새에 뒤섞인 정체모를 기척들이 일어났다가 다시 할머니 입담에 묻혀 사라질 때

시야 뿌예진 나는 그날의 회화나무 아래서 낡은 구두의 굽을 끌고 다닌다.


쭈글쭈글한 망각이 튀어 올랐다 사라지는 돗자리에 눌린 사진 속 환각들은

억눌린 여자의 슬픈미소로 아리고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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