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원고지 / 권분자

산문

by 권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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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를 다시 쓰다


권분자



현실이 막막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마음의 핸들을 꺾는다.

세상을 거스르고 싶다는 충동은 나를 역주행의 길로 이끈다.

내비게이션조차 당황해하는 그 길의 끝에 다다르면

한 장의 원고지 같은 고향 마을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 이 마을은 빽빽한 글자로 가득 찬 백과사전이었고,

나는 그 사전을 통해 세상을 알아갔다. 하지만, 다시 찾은 마을은

내 유년이 빼곡하게 적힌 기록물이 보관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백지였다.

누군가가 거대한 지우개로 싹싹 지워버린 듯 내가 기억하는 집과 얼굴은 비어있다.

텅 빈 공간은 이제 나를 압도하듯 응시한다.

낯선 글자들로 띄엄띄엄 들어찬 원고지에서

나는 내 유년의 문장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다.

골목마다 글자로 연결되던 집들은 어디로 떠났을까.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생동감 넘치던 가족의 이야기는 또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를 맞이하는 칸칸의 집들은 백지처럼 고요하다.

유년이 텅 비어버린 마을에서 나는 길을 잃은 문장부호처럼 서성거린다.

이제는 내가 살던 집의 번지조차 가물가물하다.

드디어 내가 살았던 옛집의 대문을 삐걱—하고 여는데!

문소리는 마치 박물관을 들어설 때의 느낌이다.

칸칸이 나눠진 방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살다 흩어진 한 시대의 기록 보관소 같다.

폐허의 냄새가 켜켜이 배여있는 안방은

한때 우리 가족을 가동하던 엔진룸이었다.

부모님은 이 좁고 어두운 방에서 어떻게 가난을 꿈으로 만드셨을까.

뜯겨진 벽지 틈새로 드러난 누런 신문지는 우리 가족이 견디며 쌓아온 세월의 지층 같다.

낡은 활자 위로 덧씌워진 곰팡이 꽃은 어쩌면 그 시절 아버지가 흘린

땀방울이 피워낸 무늬일지도 모른다.

1980년대 어느 날의 헤드라인 위로 어머니의 가계부 숫자와

아버지의 고단한 한숨이 엉켜 잉크처럼 얼룩져있다.

먼지가 내려앉은 마루에 둘러쳐진 거미줄은 미처 읽지 못한 채 방치된 서술어처럼 뒤엉켜 있다.

한자 한자 알차게 써 내려갔던 그 많은 생의 알갱이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세월은 왜 이토록 잔인하게 소중한 기록들을 싹싹 지워버린 것일까.

빈방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본다.

그래! 돌이켜보면 한때의 가족은 지워진 것이 아니라,

내 몸속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문장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을,

부모님이 엔진룸에서 쉼 없이 태웠던 시간들은 지금 내 혈관으로 흐르는 동력이 되었음을….

우리에게 이 안방은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생의 풍랑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다음 페이지를 준비하던 집필실이었다.

부모님이 온몸으로 써 내려간 그 빽빽한 문장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막막한 현실의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폐허의 냄새를 뒤로하고 방을 나선다.

비록 고향은 백지로 남았을지라도,

내 마음속엔 부모님이 남긴 사랑의 문장이 여전히 선명하다.

역주행을 끝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길,

나 또한 부모님이 온 힘을 다해 써내려갔던 것처럼, 내가 써 내려가야 할 눈부신 도시의 여백에

그 빈 칸에

아름다운 꿈의 단어들로 하나둘 채워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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