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혹시 외과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수술복을 입은 외과의사가 손을 들고 “메스!”라고 외치는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또는 위급한 환자를 살려내려고 분투하는 외과의사가 떠오르나요? 저는 특별하게 한 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그 때는 이론 수업을 막 마치고, 실습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저의 첫 실습은 바로 외과였습니다. 첫 실습인 만큼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늘 교수님 수술을 참관해야 하고, 어느 순간에 튀어나올지 모를 교수님의 질문에 대해 즉각 대답 하다 보니,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실습 초반에는 피로도가 늘 높았습니다.
실습은 보통 2월부터 시작합니다. 이제 막 수능을 친 신입생들이 입학을 해서, 대학 동아리에 가입하는 시기도 2월입니다. 그러다보니 2월에 동아리에 가입한 새로운 신입생들을 챙겨주는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동아리 행사에 참여했고, 행사가 끝나니 어느덧 새벽 4-5시였습니다. 다음날 수술 참관 시간이 9시였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 참관 준비하는데 까지 시간을 고려하면 집에서 잘 시간은 2시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2시간만 자도 충분하지!’ 헛된 믿음을 바탕으로 잠을 자고, 일어나는 순간 후회했습니다. 엄청 피곤하더라고요.
피곤함을 이겨내고 병원에 가서 수술실 참관을 했습니다. 보통 교수님 뒤에서 참관을 하게 되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잠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잠을 2시간 잔 것을 계속 후회하면서, 잠을 깨고자 허벅지를 꼬집고 스스로 뺨을 때렸습니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어요. 점점 잠을 안 잔 제 자신에게 화가 났고, 이렇게 계속 서 있어야 된다는 사실이 짜증났습니다. 나중에는 수술방 밖에 있는 침대가 그리워지는 겁니다. 수술 방을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지만, 어떻게든 이 악물고 버텼습니다. 집중력은 점점 떨어지고, 생각 자체가 사라져갔습니다. 머릿속에 백지장처럼 온통 하얗게 된 끝에, 결국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최초로 서서 잠에 빠져들던 순간이었죠. ‘안 돼! 눈을 떠!’ 속으로 외쳤지만, 눈꺼풀은 이미 제 말을 듣고 있지 않았습니다. 내적인 사투를 계속 벌이면서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던 와중에 큰 소리가 저를 덮쳤습니다.
야!!!!!!!!!!!!!!!!!!! 똑바로 안할래?????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거의 1초도 안 되는 순간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 때, 제 주위로 천사와 악마가 나타나 저를 향해 속삭이기 시작했어요. 천사가 말했습니다. ‘졸았던 것은 잘못한 게 맞아. 교수님의 수술을 집중해서 참관하지 않은 것은 너의 큰 잘못이야. 화내시는 게 당연하지. 솔직하게 죄송하다고 사과드리자!’ 그 옆에서 악마도 말했습니다. ‘원래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눈을 뜨면서 모른 척 해야 해.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척 해버려!’ 천사와 악마의 이야기를 듣고 0.01초 정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정했죠. ‘그래 내가 잘못한 게 맞아. 사과드리고 지금부터 정신 차리고 다시 참관하자’
결정을 내린 후, 눈을 뜬 저는 교수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
그 말을 한 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수님은 같이 수술에 참여하던 레지던트 선생님을 혼내고 계셨던 겁니다. 혼내던 대상이 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사과를 한 순간, 모두가 말을 잃었습니다. 같이 참관하던 동기들의 눈이 흔들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혼나던 레지던트 선생님의 당황한 표정도 기억나네요. 무엇보다 교수님이 황당해하셨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우리 모두에게 어색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 순간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모두가 고민하고 있던 찰나, 교수님이 드디어 한 마디를 꺼내셨죠! “그래! 너 졸고 있는 거 알았어. 지금부터 집중해. 알았지?” 하고 바로 수술에 집중하셨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분위기가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때를 떠올리면 교수님께 여전히 죄송합니다. 저는 그 상황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 이후로 절대 졸지 않고 실습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의대 실습생으로 배우는 것도, 느끼는 바도 많습니다. 그리고 힘든 일도 꽤 있었죠. 개인적으로 실습하면서 가장 힘들었고, 무서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질문이었습니다.
외과 실습을 할 때, 학생들이 하는 일들 중 하나가 스크럽입니다. 스크럽은 수술하는 교수님 옆에서 어시스트로서 역할을 하는 걸 말합니다.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술 도중 고정하거나 당겨야하는 등 손이 추가적으로 필요할 때 도와드리는 보조적인 역할만을 담당합니다. 수술복을 입고 교수님 옆에서 수술을 돕다보면 단순히 이론 공부할 때보다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가 스크럽 들어갔을 때입니다. 해당 수술의 담당 교수님께서는 학생에 대한 사랑이 너무 넘치셨습니다. 학생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 수많은 질문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직도 기억납니다.
교수님 : 학생, 일단 이 쪽 부위를 잡아 보거라!
나 : 네, 교수님!
교수님 : 근데 학생, 이 환자는 무엇 때문에 수술을 받는 거니? 이 환자의 히스토리를 말해볼까?
나 : 어.....
교수님 : 학생, 손은 제대로 해야지! 더 힘줘서 잡아야 해!
나 : 네, 교수님. 죄송합니다.
교수님 : 근데, 왜 대답은 안 하지? 이 수술을 하는 이유는 뭐지?
나 : 아, 그게...
교수님 : 손은 계속 그대로!!
나 : 죄송합니다.
교수님 : 공부 안 해 왔니?
나 : 아니, 그게 아니라...
교수님 ; 손!
나 : 네!
교수님 ; 대답은?
나 : .....
수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대답하고, 동시에 교수님을 도와드리다보니, 혼이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습니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계속 생각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수술실을 나온 직후에는 솔직히 교수님이 조금 원망스러웠습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셨어도 좋았을 텐데’, ‘솔직히 친절하게 가르쳐주실 수도 있잖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지 않으셨어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질문 그 자체가 무서워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교수님이 왜 그러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의사로서 갖춰야 할 자세를 알려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의사는 자기가 맡은 환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숙지해야합니다. 왜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부터, 지금 상황에 맡는 수술법, 그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 그에 대한 대처 등등 모든 것을 말입니다. 그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게 기본이라는 걸 학생 때부터 확실히 인지시켜 주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수술을 돕는 와중에도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오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교수님을 원망하고, 질문을 무서워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점, 정말 감사합니다. 잠시나마 원망했던 것도 죄송합니다.
사실, 그 이후로도 질문이 계속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질문은 계속 생길 것이고, 대답은 해내야 합니다. 결국 이겨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질문에 대해서 완벽하게 대답할 날을 상상하며, 저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자 공부했습니다.
의대 실습생이 되면 그 전과는 공부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실습생이 되기 이전에는 수많은 이론 수업을 듣고, 주관식이나 객관식 시험을 치는 게 보통입니다. 반면 실습생이 되면 시험보단 케이스 발표가 대표적인 공부 방식으로 자리 잡습니다. 케이스 발표는 교수님께서 지정해주신 환자와 대화를 나누고, 신체진찰을 하며, 직접 이 환자의 질환을 찾아나가는 공부법입니다. 질환을 찾고 나서는 어떻게 교육하고, 어떤 약을 써야 하는지 까지도 파악해야합니다.
수많은 교수님과 케이스 발표를 진행하게 됩니다. 케이스 발표를 하며 교수님들께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많은 것을 알려주신 교수님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데요. 그 중에서도 유독 한 교수님이 떠오릅니다. (A 교수님이라고 호칭하겠습니다)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평소에도 최신 논문을 보시면서 지식을 축적해나가십니다. 그 중에서도 A 교수님은 대화를 나눠보면 학업을 정진하는 수준이 상당히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케이스 발표를 유심히 들으시곤 해당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았던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물어보십니다. 거의 백발백중으로 대답 못합니다. 만약 대답을 해낸다면, 그보다 더 어려운 질문을 제시하십니다. 대답을 하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조금씩 질문의 수준을 낮춰가면서 부족한 의학지식을 다시 한 번 알려주셨죠.
밤을 새어가며 케이스 발표를 준비했습니다. 어느 정도 대답을 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A 교수님과의 케이스 발표를 진행하며 자신감이 바닥을 쳤습니다. 교수님이 제시하신 질문에 대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케이스 발표 하면서 딱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 나 왜 이렇게 멍청하지? 분명히 공부했는데도 대답도 못하고, 왜 이러냐?’
저 같이 대답을 하지 못한 학생에게 A 교수님이 부족한 의학지식을 채워주셨습니다. 하나 하나 알려주실 때마다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네”, “네, 이해했습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더 공부하겠습니다.”
이렇게 계속 반성적인(?) 말만 하다 보니, 교수님께서 결국 한 마디 하셨죠. “자네는 대답을 참 잘해. 그런 건 좋은데, 공부는 조금 더 했으면 좋겠네.” 교수님이 조언을 해주시자마자 거의 즉시 저는 대답했습니다. “네, 교수님!” 그러니깐 바로 교수님이 저를 혼내셨습니다. “대답만 말고 공부도 좀 하자니깐!”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대답만 열심히 했네요.
교수님과의 케이스 발표가 끝나고 나서야 부끄러움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 소용없구나. 미리 더 공부했어야 했는데.’, ‘대답만 말고 공부하라는 조언을 왜 그렇게 빨리 대답했지? 대답 좀 천천히 할 걸.’
지속적으로 배움을 추구하고, 다양한 수준의 질문을 통해 제자들의 수준을 높게 이끌어주시는 교수님을 바라보며, 훗날 A 교수님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는 대답만 잘하지 말라는 교수님의 조언대로, 더 열심히 공부해야죠.
교수님, 그 때 뻔한 반성적인(?) 대답만 해서 죄송합니다.
다양한 질환들을 배울 때, 통증의 양상이라는 것도 배웁니다. 통증의 양상은 ‘쥐어짠다’, ‘묵직하게 누른다’, ‘찌르는 듯하다’ 등등 통증이 어떻게 아픈지 자세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습을 돌던 와중, 통증의 양상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려고 하신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교수님은 저희 실습조원들을 모두 모으신 후 물어보셨죠. “자원해서 임상 실험 참여할 사람 있는가?” 왠지 모를 불길한(?) 마음에 교수님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필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교수님이 씩 웃으시더라고요. “학생, 임상 실험에 동의하겠나?” 그 순간, 제 인생의 모든 경험이 모인 빅 데이터에 의거했을 때,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차마 말로 “아니요.”라고 할 순 없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마음의 소리를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저의 강렬한 마음의 소리를 읽어내지 못하셨죠. “응, 동의하는 거지? 알겠어.” 어쩌다 보니 강제적(?)으로 임상 실험에 참여했습니다. 그 순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죠.
교수님께서 제 팔 한 쪽을 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양손으로 제 팔을 잡고 빨래 짜듯 쥐어짜셨죠. “학생, 이게 무슨 질환의 통증 양상일까?” 교수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바로 대답했어야 했는데, 순간 모른다고 대답해버렸습니다. 그러니 한 번 더 쥐어짜시더군요.
이번엔 볼펜으로(촉을 밖으로 꺼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어깨부분에서부터 손목까지 위에서 아래로 죽 그어보시기도 하셨습니다. 똑같이 질문을 하셨고, 이 역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니, 다시 느껴보라고 임상 실험(?)을 하셨습니다.
교수님이 선사해준 통증의 양상들을 제대로 느껴보느라,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려 답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심장질환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그 중, 심근경색과 대동맥 박리라는 질환을 아시나요? 심근경색은 심장혈관이 다양한 원인에 의해 갑자기 막히면서 심장 근육이 손상되며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가슴 근처에서 빨래를 쥐어짜는 것과 같은 아픈 통증이 느껴지면, 심근경색을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가슴 근처에서 볼펜으로 쭉 긋는 것 같은 심한 통증이 느껴진다면, 대동맥 혈관 벽이 찢어지면서 발생하는 질환인 대동맥 박리를 의심해볼 수 있고요. 심근경색과 대동맥 박리! 이 두 질환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주위에서 또는 본인이 해당 질환들의 통증 양상을 느낀다면 그 즉시 119에 신고해야 합니다.
교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절대 저를 괴롭히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심장질환들의 통증 양상은 의사가 제대로 알아야 환자에게도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위에서 말한 이야기들이 끝은 아닙니다. 이 이외에도 다양한 스승님들이 제 곁에 있었습니다. 의대생들은 수혈하는 법, 심폐소생술, 상처 부위에 대한 드레싱, 채혈하는 법, 부목 고정 등 의사로서 기본적인 수행 능력을 위해 임상술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 때, 저의 미숙한 임상 술기를 잘 할 때까지 옆에서 끝까지 지켜보면서 조언을 해주시고 계속 시범을 보여주시며, 인내심 있게 가르쳐주신 스승님도 계셨습니다. 또한 직접 집으로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제공해주시며, 제자들의 고충을 들어주시던 스승님도 계셨습니다.
학생 때의 저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존재였습니다. 공부를 해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질문에 대한 대답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술기를 배우더라도 한 번에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때론 조는 등의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부족하고 미성숙하던 제가 한 몫 하는 의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스승님들 덕분입니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를 만들고자 다 방면으로 노력해주시고 부족한 부분은 호되게 혼내셨으며 때로는 고충을 가만히 들어주시던 스승님들 덕분에, 지금의 제가 학생에서 의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더 배워야하고, 더 깨져야 합니다. 더 숙련되는 과정들을 거쳐 훗날 저 역시 누군가의 스승이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저를 이끌어주셨던 스승님들을 먼저 떠올리겠습니다. 스승님들이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 제자들을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를 가르쳐 주신 모든 스승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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