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공부는 역시나 어렵고 지겹습니다.
안녕하세요. 드리님. 그 사이 2주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 말씀드릴까요? 서로 편지를 주고받은 게 벌써 10번째라는 겁니다. 무려 20주라는 긴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편지를 쓰는 시간이 저에겐 유익했고 또 즐겁기까지 했네요. 저 역시 드리님처럼 특별한 일이 없는 하루가 반복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런 하루하루 사이에 드리님 편지를 받고 제가 답장을 하다 보면, 평범하다고 여겼던 날이 남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저는 오늘 새로운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2022년 6월 17일 금요일, 혹시 기억하십니까?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저에게 있어 최고의 날 중 하나이지만요. 그날은 바로 롯데 자이언츠 첫 의료지원을 갔던 날입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골수팬으로서 중앙 게이트를 통해 야구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날이며, 응원단석에서만 마주하던 조지훈 단장님과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좋았고, 구단 내부 식당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땐 지인들에게 이 맛을 알려줄 수 없어서 아쉬웠으며, 스윗하던 김원중 선수와 사진을 찍고, 쿨하게 사인하던 이대호 선수 덕분에 그날은 내내 도파민이 분비되었습니다.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여기까지만 읽고, ‘이거 예전에 편지로 길게 자세하게 말했던 거 같은데?’라고 여기신다면, 드리님은 제 편지를 매우 깊게 몰입해 주셨다는 의미가 되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때 언급했던 것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2022년 6월 17일 금요일. 그날 발생한 여러 가지 일 중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 여겨지는 건 김원중 선수, 이대호 선수, 조지훈 단장님, 구단 내부 구경 등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일이거든요.
3회 말이었습니다. 막강한 SSG와의 싸움에서 2:1로 1점 차 승부를 벌일 때, 롯데 자이언츠 유망주 중 한 명이었던 이호연 선수가 투수의 공을 쳐 냈어요. 이후 빠르게 달리고 달리던 이호연 선수는 3루에 도착했죠. 2루타에 멈출 뻔했던 안타를 3루타로 만드는 모습을 선보인 거예요. 이후 이대호 선수의 희생플라이로 1점 추가되면서 동점이 되어,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어요. 자 이제 시작이야! 지금부터 역전으로 나아가면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중견수의 바운드 없는 일직선의 레이저 송구가 홈으로 향했고, 그로 인해 이호연 선수의 태그아웃이 이루어졌죠. 메이저리그에서나 나올법한 모습을 목격했어요. 와우. 동시에, 2:2가 아닌 2:1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 일이 그냥 생긴 건 아니었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다 어떻게든 점수를 내고자 슬라이딩하는 이호연 선수.
홈으로 온 송구를 잡자마자 태그아웃하고자 이호연 선수를 향해 팔을 뻗는 SSG의 포수 이재원 선수.
3루에서 홈으로 돌격하는 이호연 선수, 홈에서 3루로 방어하는 이재원 선수.
양쪽으로 강하게 가던 힘들이 맞부딪혔어요.
어디서?
바로 이호연 선수의 머리에서.
부딪치자마자, 이호연 선수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라운드에 누워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하자마자, 저는 그라운드로 뛰쳐나갔습니다. 망설일 틈조차 없이.
2000년 4월 18일, 잠실야구장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2루에 있던 롯데 자이언츠의 임수혁 선수가 쓰러졌죠. 심정지였습니다. 지병이었던 부정맥이 원인이었고요. 쓰러진 직후, 맥박과 호흡을 확인하고 둘 다 없을 시 심폐소생술을 진행해야 했어요.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하면서 심폐소생술을 이어가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당시, 경기장 내 의료진이나 앰뷸런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늦게나마 병원 이송 후에 맥박과 호흡을 되살렸으나, 이미 시기를 놓치고 말았죠. 그는 그라운드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는 가정에 불과하지만, 제대로 된 응급처치가 이루어졌더라면, 야구 선수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임수혁 선수를 우리는 마주했을지도 모릅니다. 10년이란 긴 투병 생활 대신 말이죠.
이후, KBO엔 의료지원이 도입되었습니다. 경기장 내 의료진을 의무적으로 배치하게 되었고요. 더불어 앰뷸런스 배치 의무화도 시행되어, 언제든지 응급환자를 빠르게 이송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매우 멉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요.
2022년 10월 8일,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선수에게 의미 있는 날입니다. 그날 프로선수로서 마지막 경기였죠. 은퇴식 날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날 롯데 자이언츠 포수 정보근 선수가 타석에서 선발 선수의 공에 머리를 맞는 불운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곧바로 앰뷸런스가 들어왔으나, 정보근 선수를 앰뷸런스에 넣기까지 시간이 엄청나게 소비됐죠. 머리 부상인 만큼 제대로 된 처치가 필요하기에 소요되는 시간이 꽤 걸리는 건 당연하지만, 멀리서 봐도 의료진과 구단 측 간에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 건 확실해요. 이송 과정을 쭉 지켜보던 많은 팬이 갑갑한 나머지, 계속 야유를 보냈던 걸 지금도 기억합니다.
2023년 6월 12일, 성남시 탄천 야구장에서 고교 주말리그 도중 부상 입은 선수가 생겼습니다. 수비 도중에 발생한 충돌 사고로 치아 5개의 부러짐과 함께 얼굴 쪽 골절이 일곱 개가 발생한 거죠. 곧바로 응급처치가 이루어져야 했고,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대기하던 응급차가 있었으나 의료진이 없어 응급처치를 받지 못했고, 그 상태로 20분 동안 경기장에 방치되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참고로 말하자면, 고교야구 주말리그 경기장엔 의사, 간호사, 응급구조사 등 전문 의료진이 1명 이상은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배포한 스포츠 행사 안전관리 매뉴얼에 따르면 말이죠.
의료지원이란 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임수혁 선수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고교 야구 선수는 앞으로의 한국 야구를 책임질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부상이란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엄청난 일이죠. 특히, 부상 이후의 대처가 미숙하거나 늦게 이루어진다면, 그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각하게는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 누구도 바라는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또한 의료지원이 나왔을 때, 의료지원 나온 쪽과 구단 측과 한 번쯤은 손발을 사전에 맞춰봐야 합니다. 의료지원팀이 알아서 다 대처할 것이라 믿으면 안 됩니다. 누군가 부상을 입었다고 가정하고, 의료진은 어떻게 움직이고, 구단 측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할지, 최소한 그날 경기 전 10~30분 정도의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전 준비가 이루어졌더라면, 2022년 10월 8일 경기에서 정보근 선수를 이송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좀 더 빨랐을 것입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초고속 대처에 시민들 역시 놀라움을 표했을 거며 이대호 선수의 은퇴식이 한층 더 빛났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건 다 만약이란 생각에서 나오는 이야기니 흘러 들으셔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KBO뿐 아니라 다른 구단들에서도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큰 노력을 하고 있어요. 작년부터 삼성 라이온즈는 홈경기 때 상주할 수 있는 필드 닥터를 구하고자 대한스포츠의학회에 공지를 냈더라고요. 경기마다 바뀌는 의료지원의 형태를 벗어나, 구단과 손발을 맞춰서 효율적으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거죠. 선수들에 대한 의학적인 측면에선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야구 경기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봐요.
2022년 6월 17일 금요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날을 다시 떠올리겠습니다. 사직야구장 그라운드로 급하게 뛰쳐나갔으나, 다행히 이호연 선수에게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음날 경기에서도 안타를 치는 걸 보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죠. 그렇게 열심히 뛰고 치던 이호연 선수는 아쉽게도 롯데 자이언츠에서 KT 위즈로 이적했어요. KT 위즈에선 뛰어난 활약을 많이 선보이길 바랄 뿐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최근 롯데 자이언츠에 수많은 부상이 발생하고 있는 탓입니다. 롯데의 화끈한 공격력을 담당하던 마황 황성빈과 트레이드 성공 신화의 손호영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1군에서 이탈했습니다. 전준우 선수는 좌측 종아리 힘줄 부위 미세 손상으로 복귀까지 한 달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거기다 정훈 선수마저 엉덩이 햄스트링 건염 판정을 받아 2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2023년 4월 1일 잠실 개막 두산전에서 팔꿈치 인대 손상으로 1년 동안 경기장에서 볼 수 없었던 투수 이민석 선수. 그가 2024년 5월 19일 경기에 5선발로 등판했습니다. 정말 멋지더라고요. 2점을 내줬지만, 최고 155km/h, 평균 150km/h의 공으로 소름 돋는 피칭을 보여줬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손가락 통증을 호소하며 마운드를 내려갈 땐 흠칫했습니다. 다행히 손가락 물집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롯데 자이언츠의 선수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걱정이 앞섭니다. 2022년 이호연 선수가 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요.
https://www.spoch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651
https://www.xportsnews.com/article/1851866
https://www.news1.kr/sports/baseball/5419023
우연히 경험했던 의료지원, 다양한 선수들의 부상 소식들을 들으며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스포츠의학을 공부하기로 말이죠. 네 맞습니다. 제목에서 언급한 ‘새로운 공부’란 스포츠 의학입니다. 이게 선수들의 문제를 떠나, 운동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부상을 고려할 때 이 분야에 대한 배움이 필요하겠더라고요. 진료실에서 환자들에게 권유할 때 하는 말 중 하나가 “운동하세요”라고 해요. 그런데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세요”라는 말을 자세하게 한 적은 또 없더라고요? 그 때문에 스포츠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고, 이왕 하는 거 팀닥터 준비도 해보고자 합니다. 될지 안될진 모르겠지만, 훗날 롯데 자이언츠 팀닥터 중 한 명이 된다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분야에 관한 공부는 저에게 국한되는 건 아니죠. 바로 드리님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솔직히 대단합니다. 드리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기타를 넘어 새로운 걸 구매할 정도의 열정 (기타가 1,000만 원까지 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습니다. 더 돈 들여서 좋은 모델을 사는 건 드리님이 멋진 기타리스트가 되는 그날 하시는 걸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것도 계속 욕심 내면 끝이 없는 거 같더라고요), 밴드 음악에 관한 관심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이 이렇게까지 커진 줄은 몰랐습니다. 굳은살이 점차 늘어날 정도로 연습한다는 점에서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서 나온 일만 시간의 법칙이 떠올랐습니다. 한 분야의 대가가 되기 위해선 단순히 ‘시간’이 필요한 걸 넘어 ‘의식적으로 집중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이 책의 이야기인데, 어쩌면 드리님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진척도는 저보다도 드리님이 월등히 앞선다고 여겨집니다. 좋은 결과가 있길 응원합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을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드리님의 취미는 늘어나고, 그에 따라 야구를 향한 관심이 조금은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 때이지요. 그러나 너무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에 공감하겠습니다. 애증이란 말도 이해해요. 그러나 이왕 우리 야구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으니, 부디 이른 시일 내에 야구의 사랑이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2군에 가 있는 1군의 동료의 마음처럼 기다리겠습니다.
드리킴의 야구에 대한 열정이 돌아오길 기대하는, 동시에 취미로 행복하길 바라는 주니 킴 드림.
PS 1. 부동과 함께하는 드리킴님의 ‘10cm-부동의 첫사랑’ 음악 꼭 듣고 싶습니다.
PS 2. 밴드 이야기는 처음이군요. 언젠가는 밴드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 역시 알고 싶습니다.
[이전 편지]
http://brunch.co.kr/@drikim/29
[이후 편지]
http://brunch.co.kr/@drikim/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