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그게 꼭 나쁜 죄일까요? 사랑은 죄가 아니잖아요?
편지를 오랜만에 쓰는 기분입니다. 이번 주 역시 잘 보냈지만, 드리님의 편지를 읽으며 일주일이 한층 행복했습니다. 흐뭇함까지 동시에 다가옵니다. 드리님이 야구를 온전히 몰입했다는 걸 절절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죠. 바쁜데 귀로 듣는 중계? 화장실과 이동시간에도 챙겨 보는 야구? 저는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저보다 더 강렬하게 야구에 빠졌다고 하니, ‘라이트’ 대신 ‘헤비’한 드리님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고민됩니다.
드리님, 이번 편지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나쁜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죄가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돌이켜봤을 때, 스스로마저도 이건 악질 중에 최악질이라 여깁니다. 그렇게 판단되는 일들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안식처이자, 편안함을 꾸준히 제공하는 드리님께 제 악행에 대해 고해성사하고자 합니다. 시작해도 될지요? 허락하지 않으셔도 적을 생각입니다. 어차피, 이번에 편지를 드리는 건 제 차례니까요.
20년 지기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를 데리고 롯데 자이언츠 야구를 직관하러 갔습니다. 롯데는 보통 정해진 패턴 하나 있습니다. 상당히 짧아서 화장실 다녀오기도 애매(?)한 공격 시간. 너무 길어서 잠시 졸아도 끝나지 않으며, 대량 실점이 동반되는 수비 시간. 바로 이 패턴이죠. 하필이면 친구를 데려간 그날의 경기 속도는 평소보다도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잘못되었습니다. 평소와는 달랐던 거죠. 공격은 길면서, 수비는 최소인 말도 안 되는 경기였습니다. 찰리 반즈가 선발 투수로 나선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짧았습니다. 2시간 반 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평소라면 집에 갈 리 없는 시간대였으니까요. 야구를 많이 본 저로선 이런 날도 있는 게 당연하지만, 자이언츠의 야구를 처음 접한 친구에겐 이 경기가 기준이 되었다는 게 비극입니다. 이렇게 재밌(?)는 게 야구라니! 그렇게 친구는 야구 직관에 입문하였습니다. 이후 깨달았죠. 야구가 화가 나는 건 기본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야 한다는 걸 말입니다. 수비 시간이 길고, 공격이 짧다는 진실마저 알아버렸죠. 마치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달까요? 흐뭇(?)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생겼습니다. 야구장에 안 가 본 지 오래되었다는 그녀의 말에, 손을 잡고 사직 야구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간 날이 지금까지 2번입니다. 그중 첫 번째 경기 때는 김진욱 선수, 두 번째 경기는 이민석 선수가 선발 투수로 나왔습니다. 저는 이 두 선수를 다 좋아합니다만, 냉정히 말하면 걱정이 앞섰습니다. 둘 다 선발로서의 능력은 증명된 자료가 그다지 없었습니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이긴다는 생각을 버리는 게 편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와 간 첫 번째 경기 날, 5대6으로 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타율이 낮던 유강남 선수가 홈런을 쳐서 동점이 되었네요? 으잉? 놀랄 틈도 없이, 타율이 심각했던 박승욱 선수마저 홈런을 때리며 결국 이겼습니다. 이걸 이렇게 이기네?
두 번째 경기에선 이민석 선수가 좋지 않은 모습을 선보이며 패배가 눈앞에 그려졌었죠. 놀랍게도 롯데가 1, 2회를 걸쳐 8점 가까이 뽑아내더니, 결국 11:7로 경기에서 이겨버리더라고요. 와우! 그렇게 여자 친구는 2전 2승의 승률 100% 승리 요정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롯데 자이언츠 야구는 무조건 이긴다’라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언젠가 마주할 패배로 상처받게 될 그녀가 벌써 걱정되네요.
야구 하나도 모르던 대전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가 음주를 매우 좋아했기에 권유했습니다. 그냥 술만 마시면 재미없다. 친구들이랑 같이 야구장 한번 가봐라. 거기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맥주 맛을 기가 막히게 할 거다. 그렇게 친구는 한화 이글스 야구에 입문하고 맙니다. 다녀온 후, 그녀는 말했죠. 자주 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 치곤, 계속 가는 그녀를 목격했습니다. 전 웃으며 덕담했습니다.
“야구는 별거 없어. 지잖아? 화나. 그러면 스트레스를 받아. 짜증 나거든? 이기는 걸 보고 싶어져. 이놈들이 이기는 걸 보러 결구 또 가게 되거든? 근데 또 진단 말이지. 그러면 이 패턴이 수없이 반복된다는 거야. 그러다 이겨. 와, 역시 야구 진짜 재밌다. 이 맛에 야구 보는구나. 스트레스가 확 풀리네? 그렇게 패배했던 과거는 깡그리 잊고, 야구를 또 보러 가. 그럼 또 져. 그럼 어떻게 되겠어? 뫼비우스의 띠에 빠지는 거야!”
친구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제 눈엔 똑똑히 보였습니다. 이미 야구의 늪에 깊게 들어왔다는 걸요. 이 편지로 친구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미안하다, 야구,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그런데 그거 아니? 끝은 없단다. 나도 끝이 뭔지 모르는데, 너에게 어떻게 알려주겠니? 후후후.
저의 악행을 정리하겠습니다. 야구는 재밌다는 편견을 심어준 죄. 롯데의 야구는 무조건 승리한다는 생각에 빠지게 한 죄. 야구의 지옥에 빠뜨린 죄. 이 세 가지입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 죄는 바로 드리님에게 저질러 버렸습니다. 야구를 좀 더 진득하게 보면 좋겠다고 권유하던 시점은 롯데가 전일 기아를 3승으로 잡고, 삼성을 2번 잡은 5승 1패였습니다. 드리님이 야구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한화에 3패를 헌납하더라고요. 다행히 NC 상대로는 2번을 잡았지만요. 야구를 권유한 시점이 좋지 않았던 게 4번째 죄입니다.
돌이켜보면 롯데 자이언츠는 정말 무서운 팀입니다. 강한 이에게는 강하면서 약한 이에게는 한없이 약한 유교문화에 젖어 든 선비 팀인 게 확실합니다. 멋지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롯데 팬들 사이에선 뒷목을 잡게 하는 팀이네요.
여담이지만, 이번 주 일요일, 더블 헤더 2번째 경기에서 졌다면 롯데 자이언츠가 고해성사해야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이언츠 1라운드 1번으로 반드시 지명(?)해야 하는 신인 투수 카리나가 시구를 하러 와서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꽂아 넣었기 때문입니다. 첫 경기는 졌지만, 두 번째 경기는 이겼기에 이번 주는 KIA, SSG 상대로 위닝을 거둔 멋진 주입니다. 하다 하다 MBC에서 수훈 투수로 카리나를 지목했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그 경기에서 졌다면 롯데 팬들과 함께 에스파 팬들에게 뭇매를 맞지 않았을까! 무서운 상상이기에 이내 잊었습니다. 제 정신건강도 챙겨야 하거든요.
고해성사했지만, 제가 한 일들이 꼭 나쁜 죄일까요? 야구에 대한 사랑은 죄가 아니잖아요? (물론 야구 대신 불륜이 들어가면 그건 죄입니다) 이 좋은 걸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 게 악행입니까? 그러다 본의 아니게 편견에 빠진 건 제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 롯데 탓입니다. 어쨌든 자이언츠를 좋아하는 팬들을 늘렸습니다. 야구 그 자체를 사랑하게 만들어 뿌듯합니다. 전 잘못한 게 전혀 없습니다. 선량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착하게 살아온 제가 롯데 자이언츠를 만난 게 불행일 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자이언츠에 대한 업보를 저만 가져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드리님이 말하신 ‘우리’ 팀을 한없이 포섭해서 야구에서 얻는 스트레스와 화라는 업보를 나눌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습니까? 허허허.
저도 드리님 말에 십분 공감합니다. 저라고 마냥, 야구를 늘 즐겁게 보겠습니까? 직관할 땐 모르겠지만, 집에서는 공격만 보는 날도 있고요. 전부를 챙겨 보기도 하지만, 그날의 기분에 따라 중계 대신 예능 보며 하하호호 할 때도 있습니다. 저도 지치고 힘들거든요. 2022년부터 2024년까지 45경기 직관했습니다. 무서운 페이스네요. 집에서 보는 야구까지 합치면 100경기는 족히 넘을 겁니다. 롯데 자이언츠 야구에 익숙해질 만큼의 시간입니다. 덕분에 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랍니다. 직관 가서 안타가 많이 나오지 않으면, 졸리더라고요. 활력이 줄어들고 무관심이 점차 커집니다. 열정이 넘치던 저도 결국 그렇게 되더라고요.
별개의 이야기지만, 5월을 넘어서서 6월로 진입하는 롯데 자이언츠는 뭔가 확실히 이상합니다. 정말 달라요. 트레이드 성공 신화인 손호영 선수, 베테랑 정훈, 전준우 선수. 이들이 주로 승리에 기여했는데요. 그들이 다치고 말았습니다. 올해는 희망이 없겠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게 저의 잘못된 판단이었더군요.
1번에서 어떻게든 도루에 성공하며, 심지어 아웃 될 거 같은 걸 세이프로 만드는 황성빈.
1번에 부담이 있었던 탓일까요? 2번으로 바꾼 이후 자신의 타격을 보여주는 윤동희.
흔들리지 않는 수비와 3월과는 다른 강력한 빠따를 보여주는 고승민.
이대호 이후 1루에 대한 고민을 지워주는 롯데의 중심타선 나승엽.
0할에서 3할 근처 타율에 이르고 가끔 메이저리그급 수비를 선사하는 유격수 박승욱.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아쉽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1라운드 1번 지명의 의미를 알리는 김민석.
되게 맹했던 첫 이미지와 달리, 꾸준함으로 4번 타자의 저력을 보여주는 빅터 레이예스.
올해 초에 과도하게 실망했지만, 점점 좋은 모습을 선보이는 안방마님 유강남.
타격 폼이 올라오는 포수 손성빈.
KBO에선 2년, 롯데 구단에선 3년 만에 완봉을 달성한 투수 윌커슨.
탈삼진왕으로 자이언츠에 없어서는 안 되는 투수 반즈.
1회에 표정만 보면 그날의 경기 결과를 알 수 있지만, 여전히 에이스인 안경 선배 박세웅.
선발 투수들이 무너져도 그 뒤를 어떻게든 잘 메꿔주는 투수 최이준.
기세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개인적으로 정말 멋진 형님이라 생각하는 투수 김상수.
새롭게 선발 투수로 떠오르는 파이어볼러 이민석과 김진욱.
다독이기도 하고 때로는 혼내면서 선수들의 가치를 어떻게든 끌어내는 김태형 감독과 코치진.
그들이 보여준 올해 5월 롯데 성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3승 1무 10패, 승률 0.565
3, 4월의 8승 1무 21패 승률 0.276의 성적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6월 10일 기준으로 6월은 5승 3패로 결국 8위까지 올라갑니다. 전 솔직히 10위 유지라고 여겼는데, 믿을 수 없는 요새입니다. 올해도 기대되지만, 내년의 밝은 미래가 무척 기대됩니다. 2025년은 소름 돋는 일이 터질 거 같다는 상상도 하게 되더라고요. 거기다 올해 손호영 선수와 정훈 선수가 돌아왔고, 부상당한 반즈와 전준우 선수까지 돌아온다면요? 2024년만큼은 악명 높은 봄데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작은 소원이지만 단 한 경기라도 가을야구를 할 수 있는 5등까지라도 도달한다면?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희망이 절로 생깁니다.
그렇기에 고해성사할 만큼의 죄를 저질렀음에도, 한편으론 제 죄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가 올해 가을야구 가면 이 죄는 없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못 간다면 그 죄에 대한 형량은 2배가 되겠지요.
드리님이 느끼는 무기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전 편지로 제 번아웃에 대해서 말씀드렸다시피 사람마다 그런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저도 최근에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어, 제 감정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드리님의 현 상황을 이해합니다. 더불어, 전 믿고 있습니다. 드리님만의 방식으로 이 상황을 잘 풀어가리라고요. 밴드도 즐겨보시고, 집에서 홈트도 하시고, 시간이 된다면 책과 함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시는 등 드리님만의 시간을 더욱 많이 가져보세요. 그러다 보면 이 시기를 현명하게 잘 넘기실 겁니다. 한없이 믿으며 기다리겠습니다.
한편으론 아쉽습니다. 드리님의 글은 매력 있습니다. 야구에서 느꼈던 바를 삶과 철학 등과 함께 잘 엮어서 이야기하는 드리님만의 글이 좋았습니다. 독자로서 제가 바라보는 야구 관점과 다르다는 걸 배웠죠. 그렇게 매주 오는 편지에 빠져들었고, 이내 그 편지를 사랑했습니다. 최근 들어 야구보단 다른 취미로 빠지는 것 역시 드리님의 라이트한 경향 때문이란 걸 압니다. 드리님이 느끼는 어려움과 힘듦 때문에 야구와 멀어지는 글을 쓰는 걸 누구보다 잘 알죠. 그럼에도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2주마다 선사하는 편지가 너무나도 좋았다고. 그러니까 야구에 한 번 더 시선을 돌려주면 어떠냐고.
이번 주는 뭐랄까요? 주니의 관점을 잘 담은 드리님의 글을 보는 거 같아 신기하면서도 재밌습니다. 드리님이 보는 제 글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습니다.
저 역시 드리님과 함께 하는 날을 바라고 있습니다. 저의 전적은 6월 10일 기준 9승 1무 8패입니다. 나름대로 승리 요정이라 자부할 수 있겠습니다. 드리님께 승리를 안겨다 드리고 싶은 마음과 함께 이 편지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약속의 8회와 같이, 우리의 약속 올해 안에 이루어지길 기다리겠습니다.
수많은 죄악(?)을 저질러 고해성사했으나, 사실 뭐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기에 매우 악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이언츠의 헤비한 팬 주니 킴 올림.
PS. 그래도 죄악 4개 중 하나는 사라졌습니다. 여자 친구가 바람처럼 사라졌거든요…….
[이전 편지]
http://brunch.co.kr/@drikim/30
[이후 편지]
http://brunch.co.kr/@drikim/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