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돼. 스스로 이겨내야 해.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돼. 스스로 이겨내야 해.
드리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저는 변함없이 똑같이 지냅니다. 매일 가족들과 저녁 먹으며 야구를 보고, 잘하면 기뻐하고, 못하면 욕하는 그런 일상 말입니다. 최근엔 3연승을 거두고 있던 터라 집안 분위기가 매우 좋습니다. 롯데만 잘해주면, 집이 행복해지고, 부산시가 기쁨으로 넘치게 될 것이며, 그게 결국 선수들의 유니폼 구매까지 이어질 텐데 말입니다. 제발 잘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 역시 언제든지 유니폼을 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 와중에 드리님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공감이 가는 포인트들이 늘 넘쳐나지만, 이번에는 유독 하나가 자꾸 신경 쓰이더라고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병’. 결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기 때문이죠. 최근 들어 저 역시 그 병의 재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업무를 처리하고 돌아오면 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운동을 해서 건강해지고 싶고,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고 싶으며, 글을 써 내려가며 제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싶습니다. 퇴근하고 나서 3~4시간 동안 할 일 하고 나면 벌써 잠을 자야 할 시간입니다. 젠장. 하루하루가 짧군요. 하지만 매일 이렇게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순 없더라고요. 왜 그런 줄 아나요? 이상하게도 갈수록 재밌는 드라마, 영화가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디즈니플러스의 [지배종], 티빙의 [선재 업고 튀어], 넷플릭스의 [눈물의 여왕] 등 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갑니다. [지배종]은 기업, 정치, 스릴러를 잘 엮은 드라마이며, [눈물의 여왕]은 아는 맛인데 그래도 정말 맛있는 드라마랄까요? 마지막으로 [선재 업고 튀어]는 설레는 감정을 몽글몽글 올라오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드라마 등에 빠지면 할 일을 미루게 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런 젠장. 그래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계획된 휴식인 척하는 휴식’이 뭐 그렇게 잘못되었습니까? 아마, 잘못된 거라고 비판한다면, 수많은 직장인에게 지탄받으실 겁니다.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계획된 휴식일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척’이 들어가야 합니까?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저 역시 침대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많이 누울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저는 이미 많이 누웠습니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고요. 거참 행복하군요.
드리님의 진지함이 가득 담긴 편지를 읽으며, 저 또한 고백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병’ 이상을 겪어봤습니다. 아마 들어보셨으리라 여깁니다. 바로 ‘번아웃’입니다. 그 친구를 마주했을 때 느낌을 떠오르는 대로 읊어보겠습니다.
너무 힘들었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의욕 넘치는 상태로 병원 실습도 돌고, 강연 생활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던 나였다.
그게 얼마 전이었다.
느닷없이 무기력해졌다.
쉬어도 쉰 거 같지 않다.
가득 찼던 에너지가 계속 바닥을 보였다.
충전하려고 해도 충전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따금 한 번씩 숨이 막혔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없으리란 생각이 나를 잠식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쉬고 싶다.
내가 하던 모든 걸 잠시만 멈추고 싶다.
그래, 도망치자.
지금 늦지 않았어.
1년이라도 좋아.
그냥 내려놓고 잠깐이라도 떠나자.
그게 지금이야.
‘번아웃’이란 이름을 가졌던 친구를 만났던 건 2018년 1월 초였습니다. 본과 4학년 시작 직전, 저에게 위기가 찾아왔죠. 의대를 오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에 와서도 제가 할 수 있는 바를 해나갔습니다. 제대로 쉴 틈이 없었던 게 원인이었어요. 단 한 순간이었습니다. 문제는 급작스럽게 터져 나오고 말았죠. 참고 참았던 제 상태가 극심하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깨달았어요. 지금이 쉴 타이밍이라는 걸. 그래서 선택하고자 했습니다. 휴학이란 길을. 최소 1년 동안은 가만히 쉬려고 했던 기억이 문뜩 떠오르네요.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던 저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어요. 본과 3학년 말에 신청했던, 그러나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해외 실습을 갈 수 있게 된 겁니다. 모교와 자매결연이 된 프랑스의 ‘릴’ 대학교 병원 실습 기회를 잡게 되었죠. 무려 한 달 동안.
그때 결정했습니다. 그래, 휴학은 나중에라도 선택할 수 있다. 단 한 달이라도, 이 모든 걸 놓아버리고 저곳으로 가보자. 유럽으로. 치이고 치여서 닳아버린 나 자신을 이끌고 일단 해보자. 그 이후에 결정하자. 잠시 멈출지. 아니면 계속 나아갈지…….
작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를 통해 말했습니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기에, 여행지에서 자기 자신만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고.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 등이 여행자를 대변하며 특별한 존재(Somebody)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가 된다고 말입니다.
그 말이 무엇인지를 한 달 동안의 유럽 일정에서, 그것도 이틀 정도 머물렀던 네덜란드에서 온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매력적인 나라였습니다. 암스테르담의 고고하고 현대적인 분위기, 튤립과 유럽 풍경들의 조화, 제 머리를 때리는 엄청난 충격을 주던 홍등가, 네덜란드의 예술을 보여주던 박물관 등. 그러나 네덜란드 그 자체보단 노바디(Nobody)가 되는 순간들이 저에겐 매혹적이었습니다. 유럽이란 거대한 문화권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안에서 제 정체성은 오로지 한국의 20대 후반 남자였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낯선 곳에서 관광객과 현지인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굳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숨을 수 있었고요. 고유의 개별성을 잠시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게 저를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항상 고민에 빠지게 했고, 그 덕택에 숨 막히게 했으며, 심지어 번 아웃 늪에 빠지게 하던 저 자신을 잠시나마 잊어버려도 되었으니깐요. 무엇인가를 얻으며 ‘나’라는 사람을 더 알아가고 정립하는 일련의 과정이 여행이라 여겼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여행이란 때로는 정체성을 잠깐 버린다. ‘나’를 잊고 살아간다. 수많은 굴레 속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하여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 그 또한 여행의 이유라는 걸 배우게 된 계기였어요.
처음으로 직격타를 맞았던 번아웃에서 벗어나게 된 건 여기서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게 된 건, 결국 스스로 이겨낼 수밖에 없다는 걸 몸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병’, ‘번아웃’ 모두 말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요. 잠시 멈춰서 쉬는 한이 있더라도요. 언젠가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친구들입니다.
저희 편지의 핵심인 롯데 자이언츠 야구 이야기로 방향을 좀 틀어보겠습니다. 4월 24일 SSG와의 경기에서 롯데를 이끄는 김태형 감독이 한동희 선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동희야,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이 편안히 해라, 괜찮다고 말했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돼. 스스로 이겨내야 해.”
땅볼에 삼진 등의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는 한동희 선수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조언이었습니다. 사실 이 조언은 한동희 선수에게만 향하는 내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롯데 자이언츠 모두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라 생각했어요. 2024년 롯데 자이언츠의 핵심 플레이어인 손호영 선수를 LG와의 트레이드에서 데려오고, 한화전 때 1:0의 싸움에서 고의사구 2번을 통해 승리를 이겨내는 등 명장 김태형 감독이 자신의 역량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이겨내야 하는 건 오로지 선수들의 몫입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승리 하나하나, 가을야구, 더 나아가 한국시리즈, 끝에는 우승에 도달하기까지! 그 순간을 바라고 비용을 지불하는 수많은 팬이 있는 이상, 그들은 어떻게든 해내야 합니다. 그랬기에 이제 괜찮다고만 말할 수 없다는 김태형 감독의 말이 저에겐 많이 와닿았습니다.
https://v.daum.net/v/20240501131520313
선수들에게도 김태형 감독의 말이 온전히 받아들여진 탓일까요? 놀랍게도 키움 상대로 이겼으며, 5회까지 이기고 있으면 무조건 승리한다는 공식을 무려 14번 이상 보여준 삼성 라이온즈의 마운드를 괴멸시키는 등으로 위닝시리즈 얻고 총 3연승을 거뒀습니다. 물론 이러다 연패의 길로 빠져들지 모릅니다. 롯데 자이언츠가 결국 이겨낼 수 있을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게 92년 우승한 해에 태어난 팬의 마음이에요. 마찬가지로 드리님 역시 ‘아무것도 하기 싫어병’을 이겨내리라 봅니다. 단지 하고 싶은 걸 조금은 줄여서 조금 더 집중하는 게 어떨지 추천합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많은 걸 하려다 보면, 결국 그 모든 걸 놓치게 되더라고요. 제가 그런 경험을 많이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마블 영화를 3번 정주행했던 저로선 캡틴 아메리카의 장점을 야구광 팬 하나로 압축시킬 수 없다고 봐요. 그는 강한 상대라고 하더라도, 질 게 뻔히 보이더라도 계속 일어나서 싸우는 모습을 꾸준히 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외치는 말이 하나 있죠. “Always” 말과 함께 행동이 일치하던 캡틴 아메리카. 저는 그를 참 좋아했습니다. 부디 그가 올곧이 외치던 말을 롯데 자이언츠 역시 이어갔으면 하는 게 제 작은 바람입니다. “Always win!”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챙기는 걸 좋아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닫는 요즘입니다. 제게 주어진 일을 하다 보니, 아끼고 좋아하던 이들에게 카톡 한 번, 전화 한 번 하는 게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드리님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민하지도, 영민하지도 철저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생각하고 전화를 준다는 마음. 목소리를 편지에 대입해서 떠올리는 그런 마음이 저에겐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그런 드리님과 편지 주고받음을 오랫동안 하고 싶을 뿐입니다.
드리님과의 직관을 고대하는 헤비한 팬 주니 킴 드림.
PS. 이 편지를 거의 완성할 때쯤, 2024년 5월 9일입니다. 한동희 선수가 김태형 감독의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였던 걸까요? 놀랍게도 그날 3타수 3안타를 해냅니다. 그러나 허벅지 통증으로 교체가 되죠. 한동희 선수만 생각하면 이젠 마음이 아픕니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주루는 힘들 거 같으나, 대타는 가능할 거 같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를 악물고 자신을 증명한 한동희 선수! 비록 한 경기였지만, 상무 가기 전까진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바랄 뿐입니다.
[이전 편지]
http://brunch.co.kr/@drikim/28
[이후 편지]
http://brunch.co.kr/@drikim/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