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오후에 CT 촬영하시죠? 해당 검사 결과가 더 잘 나오도록 하기 위해, 조영제를 사용하고자 동의서를 받으러 온 인턴입니다.”
“OOO님, 동의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혈압이나 당뇨 약 드시나요?”
“어…….”
“죄송한데요.”
“무슨 약을 드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는 수많은 동의서가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내시경 검사, CT 촬영을 위한 조영제 사용, 수혈 등 각각에 대하여 해야 하는 이유, 그에 따른 부작용을 설명해야 함은 물론이고, 이후 질문과 대답이 오가며, 이 모든 게 완료되면 동의서에 의사, 환자 또는 보호자의 사인이 들어가게 된다. 그 과정 중에 필수적으로 물어봐야 하는 게 바로 현재 앓고 있는 질환이나, 복용 중인 약에 대한 거다.
물론, 대답을 원활히 잘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꽤 마주한다. 그러다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이들도 종종 보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위 대화의 보호자다.
“왜 그걸 모르십니까?"
“기본적으로 먹고 있는 약이나 앓고 있는 질환 등을 숙지하셔야죠!”
“보호자가 되어서 환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이런 식으로 환자 또는 보호자를 타박하거나 몰아세울 수는 없다. 왜냐고?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나라고 안 그럴까?
나 역시 언제든 그럴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에 강하게 말하기는 힘들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던 2020년, 아버지의 얼굴에 빨갛게 발진이 일어났다. 마스크를 착용한 부위들에서 피부 발진이 발생하였기에, 마스크로 인한 문제라 여기고 아버지께 피부과 갈 것을 권유했다. 다음 날 진료 받고, 약까지 복용했으나 아버지의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원인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다 보니, 결국엔 답을 찾았다. 바로 아버지가 드시던 통풍 약 때문이었다.
우리가 먹는 음식 속에는 퓨린(purine)이라는 물질이 있다. 퓨린은 보통 육류, 알코올, 등푸른 생선 등에 많은데, 이런 음식을 섭취하면, 퓨린이 인체 내에서 대사 과정을 거치고 남는 물질이 생기게 된다. 이를 요산이라고 한다. 보통 요산은 소변, 대변을 통해 배출되지만 그렇지 못하거나, 또는 과잉 생산되면 혈액 내의 요산 농도가 높아지게 되고, 그러면 요산염 결정이 생성된다. 이들이 관절의 연골, 힘줄, 주위 조직 등에 침착되어, 관절의 염증을 유발하여 통증을 일으키는 것부터 신장 질환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를 통틀어 통풍이라고 말한다.
통풍의 치료제 중 하나로, 요산 생성을 억제하는 알로푸리놀(Allopurinol)이 있다. 근데, 이 알로푸리놀의 부작용 중 하나가 바로 피부발진이다.
해당 통풍 치료제를 바꾼 이후, 아버지의 피부 발진은 사라졌다.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이 이야기에 큰 문제가 하나 숨어있다. 정답을 혹시 알겠는가? 바로 아버지가 통풍 약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통풍과 관련된 내과가 아닌 피부과를 아버지께 권유하게 된 거다.
고백하겠다. 나의 문제도 분명 존재한다. 의사인 아들이 아버지의 질환을 모르다니……. 하지만, 아버지가 숨기려고 했던 탓도 있다. 술 드시는 걸 그 누구보다 좋아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이전부터 과도한 음주 이후 발생하는 급성 통풍으로 인해 엄지발가락 통증을 자주 느끼셨고, 그때마다 병원에 방문하여 약을 드셨다고 한다. 이게 무려 10년 이상 되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통풍이 있다는 걸 가족들이 알게 되면, 음주를 막을 꺼라 추측했다고. 나도 나지만, 배우자인 어머니마저도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진실을 갑자기 받아들여야 했다. 준비되지 않았던 지라, 꽤 큰 충격을 받으셨으리라.
혹시나 해서 말하겠다. 오해하면 절대 안 된다! 이 글을 쓰게 된 건 아버지를 비난하고자 하는 목적이 절대 아니다. 내가 느꼈던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하고자 글을 써 내려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몰래 숨겼다고 하더라도, 내 가족이 무슨 약을 먹고 있는지, 어떤 질환을 가졌는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동시에, 정말 무서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았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크게 키워, 돌이킬 수 없게 만들까 봐 말이다. 의사로서도, 무엇보다 아들로서 그 어느 때보다 쪽팔리고, 나 자신이 정말 창피했다.
이후, 아버지가 귀찮을 정도로 체크한다.
“약 까먹지 않고 잘 먹고 계시죠?”
그리고 이 이외에도 확인한다.
“올해 건강검진 기간이죠? 신청해드릴까요?”
“검사 결과 나왔어요? 제가 한번 볼게요.”
나의 이야기 같은 경우가 생각보다 흔하다. 공중보건의사로 일하면서, 가족들 몰래 약 타러 오는 환자들을 많이 마주하였다. 그러다 들켜 가족들과 함께 큰 병원에 가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정확히는 ‘함께’라기 보단 끌려갔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또는, ‘나는 안 그러리라.’, ‘우리 가족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야!’라고 막연하게 믿지 않길 바란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생각보다 많은 신경을 쏟아야 한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걸, 내 이야기를 통해 오래 기억하길 바란다.
PS.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더 노력하리라. 여러분들에게 권유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제대로 실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