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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날 Apr 01. 2024

세계 제일 게임 회사의 숨통을 끊은 E.T

너무 인기가 높아 다들 무리수를 두게 만든 바로 그 작품.

경향신문 1983년 4월 27일 '주부 기자석'을 보면 '어른들 장삿속에 일그러진 꿈의 ET'라는 제목으로 동심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E.T 상품들을 지적하는 칼럼이 실렸다. 1983년의 이 칼럼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E.T는 한국에서 1984년에 개봉했기 때문이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가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어른들 장삿속에 일그러질 정도로 관련 상품이 많이 나온 것이다.

1983년 8월 26일 조선일보에 아주 묘한 광고가 실린다. E.T수입을 추진하고 있는 현진 영화사가 순국열사, 의사들의 피어린 투쟁기록들을 매년 1편씩 영화화하여 독립기념관에 기증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음을 알리는 광고였다. 아무리 봐도 E.T 수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광고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현진 영화사가 정부를 상대로 벌인 여론 전이었다.

현진 영화사는 E.T를 수입하기로 가계약을 맺었지만, UIP에서 요구하는 100만 달러가 넘는 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물론 이미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아카데미상 9개 부분 수상에 개봉도 하기 전에 대한민국에서 E.T 열풍을 일으킨 E.T를 수입하는데 돈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수입가 상한선'이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외화의 무분별한 수입은 외화 낭비라는 이유로 정부가 금지시켰다. 1982년의 국민 총소득이 2050달러였던 시절이니까. 기사에도 나오듯 그동안 외화 수입 최고가는 1977년의 '죠스'로 38만 달러였다. 38만 달러의 몇 배가 되는 E.T의 수입허가를 문공부가 내려줄 리가 없었다.

현진 영화사의 일송정 푸른 솔을 앞세운 광고는 앞으로 정부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매년 찍어서 독립 기념관에 기증할 테니 문공부에 수입가 상한성을 올려 달라는 읍소였던 것이다.

결국 현진 영화사는 1년 간의 줄다리기 끝에 45만 달러에 계약을 맺고 수입하게 된다. 협상을 꾸준하게 이어가기도 했지만 영화 수입 가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E.T가 한국에 개봉해서 큰 흥행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한국 최초로 윤형주 가수, 심수봉 가수, 김수철 가수 등을 불러 롯데호텔 크리스털 볼룸에서 특별 시사회와 디너쇼를 열었을 정도다.

40만 돌파를 내세우는 E.T 광고, 실제로 E.T는 60만 관객을 돌파하여 1982년 외화 흥행 1위를 차지하지만, 너무 늦게 수입되면서 이미지를 너무 많이 소비한 탓인지 60만 관객으로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E.T가 너무 흥행해서 벌어진 일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세계 제일의 게임회사였던 아타리의 숨통을 끊은 아타리 2600용 E.T(1982) 게임이었다.

영화 프랜차이즈를 게임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를 원작으로 만든 게임은 망하는 경우가 많다. 망한 게임, 망겜을 리뷰해서 유명해진 유튜버 'AVGN(The Angry Video Game Nerd)'가 리뷰한 수많은 망겜 중에서 영화 원작 게임이 절반을 넘어갈 정도로 영화 원작 게임은 망겜이 많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손꼽아 E.T 게임을 최악으로 꼽는다.

아타리 2600용 E.T게임은 400만 개의 게임팩을 생산했지만 150만 개 밖에 팔리지 않아서 나머지 250만 개를 뉴 멕시코 사막에 파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작품이다. 당시 지금의 닌텐도 하고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 제일의 게임 플랫폼이었던 아타리 2600은 E.T 게임의 흥행실패가 시발점이 되어 멸망하게 된다. 1983년에 일어난 북미시장의 비디오 게임 버블 붕괴를 아타리 쇼크라고 부르는데, E.T가 아타리의 숨통을 끊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워너 브라더스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욕심냈기 때문이다.


창업자 놀런 부쉬넬에 의해 비디오 게임 역사를 만들어낸 아타리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1976년에 2600만 달러에 워너 브라더스의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지금의 타임 워너)에 인수된다. 당시 아타리는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게임기 회사였고 그 가치는 어마어마했다(애플의 창시자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도 아타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벤처 기업이었던 아타리가 대기업에 인수되고 창업자인 놀런 부쉬넬 등은 쫓겨나고 대기업인 워너가 아타리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에 인수된 벤처 기업이 대부분 그렇듯이 사업규모를 계속 확장하기 시작했고, 그 절정이 E.T(1982) 게임의 크리스마스 발매였다. 


E.T의 세계적인 흥행은 뭐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프겠지만, 워너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계약을 맺고 E.T 게임 라이선스를 2천만 달러에 구매한다. E.T의 세계적인 흥행을 염두에 두어도 너무 거액인 2천만 달러(4천만 달러라는 이야기도 있다)에 구매한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환심을 사서 차기작은 워너 브라더스와 찍으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전까지 유니버설과 콜롬비아 영화사와 작업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차기작인 '컬러 퍼플'과 '태양의 제국'을 워너브라더스와 찍게 된다.

1982년 6월에 개봉한 영화의 라이선스를 7월에 번개 같이 라이선스 계약을 따내지만 워너의 경영진 등은 1982년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서 내놓을 계획을 세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서 납품하려면 최소한 9월에는 게임팩의 생산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니까 게임을 만들 시간이 딱 5주뿐이었던 것이다.


영화 원작 게임이 대부분 망작이 되는 이유, 바로 시간제한 때문이다. 영화의 유명세를 이용해서 만들어지는 게임은 영화가 유명한 동안 팔려야 한다. 그 기간은 아무래 히트작이라고 해도 길지 않고, 비디오 같은 2차 이용이 불가능했던 시절에는 더욱더 그랬다.

E.T 게임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서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게임 개발에 반년은 필요로 하지만 5주밖에 시간이 없었고, 게임은 딱 '5주 만에 만든 게임 치고는 괜찮은 수준'으로 나왔다.

E.T의 인기로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E.T 게임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자 너무 난해하고 조잡한 게임에 질린 사람들이 반품을 했다. 그렇게 대량의 반품을 포함한 250만 개의 재고를 끌어안은 워너는 그걸 뉴 멕시코 사막에 묻었다.

250만 개의 게임 팩을 사막에 묻었다고 했을 때는 다들 도시전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도시전설을 뒤쫓는 사람들에 의해 2014년에 '발굴' 되었고 이 발굴과 E.T 게임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아타리: 게임 오버(2014)'가 만들어졌다.(예전에는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었는데, 지금은 내려가서 볼 수 없다.)

왼쪽: 스티븐 스필버그, 오른쪽: 하워드 스콧 월쇼

E.T게임을 만든 게임 디자이너 하워드 스콧 월쇼는 전에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원작으로 '레이더스,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1983)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레이더스 게임 제작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는 하워드의 작업실을 자주 찾았고, 당시 지금 찍고 있는 E.T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하워드 스콧 월쇼는 E.T 게임을 제외하면 많은 게임을 성공시킨 게임 디자이너였지만, E.T게임의 실패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고 게임 제작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는 그 뒤 많은 직업을 전전하다 자신과 같은 마음의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을 케어하기 위해 '실리콘 밸리 전문 심리 치료사'의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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