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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날 Mar 17. 2024

돌아온 '넘버 3'

정말 별들의 전쟁이 된 넘버3

송능한 감독의 데뷔작 넘버 3(1997)의 포스터 중에 '별들의 전쟁이 시작될 조짐?'이라는 헤드라인의 포스터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세계적인 3류가 되겠습니다.'라는 헤드라인의 포스터가 더 많이 쓰였기 때문에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포스터였지만, 넘버 3 보다 '별들의 전쟁이 시작될 조짐?'이라는 헤드라인이 잘 어울리는 영화는 더 없을 것이다.

포스터에 등장한 배우들이 모두 넘버 3를 통해서 유명세를 얻었고, 특히 송강호 배우의 발견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극판에서 두각을 보이다 명품 조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한국 영화 스타 탄생 스토리 자체가 넘버 3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1998년 초반에 공군에 입대를 했는데, 훈련소에서 동기들이 넘버 3 불사파 송강호 성대 모사를 너무 많이 해서,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해서 첫 휴가 때 제일 먼저 넘버 3 비디오를 빌려 봤을 정도였다. 영화의 대사 하나하나 모두 유행어가 된 영화는 타짜가 나오기 전까지는 넘버 3 만의 타이틀이었다.

투자를 책임졌을 주연배우인 한석규 배우와 이미연 배우를 제외하면 가장 이름 값이 높았던 배우는 최민식 배우인데, 당시 넘버 3를 본 관객들은 넘버 3의 마동팔 검사를 통해서 최민식 배우를 재발견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파묘가 900만을 넘기 직전이고, 아마 글을 올리는 순간 900만을 넘어 천만을 향하고 있을 텐데, 그런 천만 영화 파묘를 견인하는 국민 배우 최민식 배우가 정말 국민배우가 된 것은 넘버 3 이후의 일이라는 사실을 지금은 믿지 못하겠지만. 실제로 드라마 '사랑과 야망'과 '서울의 달'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지만, 영화에서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에서 비중이 높다고 할 수 없는 선생 역할을 빼면 넘버 3까지 이렇다할 필모그래피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영화 배우 최민식은 넘버 3(1997)를 시작으로 조용한 가족(1998), 쉬리(1999), 해피엔드(1999),파이란(2001),취화선(2002) 그리고 올드보이(2003)로 이어졌다.


데뷔작부터 기대를 모은 감독은 없지 않지만,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한복판에서 송능한 감독의 넘버 3만큼 성과를 보이고 기대를 모은 작품은 없다. 오히려 박찬욱 감독이나 곽경택 감독처럼 데뷔작에서 망하고 두 번째 작품도 망하고 3번째 작품에서 대박을 치는 것이 한국 감독의 일반적인 루트라는 우스개도 있을 정도였다.

송능한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세기말(1999)에 큰 관심이 몰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터뷰에서 송능한 감독은 충무로에 진입하기 위해 타협을 한 '넘버 3'에 비해, 타협에서 자유롭고 자신의 의도가 더 살아있는 작품으로 '세기말'을 꼽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기말의 흥행 실패와 함께 캐나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송능한 감독이 세기말의 흥행 실패로 인해 큰 쇼크를 받아 영화계를 떠났다는 것이 거의 사실처럼 이야기 되었다. 특히 세기말에서 영화 잡지의 별점 평가를 비판하는 씬이 있었기 때문에 별점 평가로 유명한 주간 영화지가 원흉처럼 알려지고 했다.

송능한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세기말이 망한 것은 관객들이 송능한 감독에게서 '넘버 3 2'를 원했기 때문이다.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데뷔 성적이 너무 좋아서 다음 작품에서 망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지만, 송능한 감독의 경우는 넘버 3가 한국 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축복이다 저주였다.

'세기말을 살아가는 당신들에게 던지는 재떨이 같은 영화'라는 헤드라인이 붙은 세기말 포스터가 있다. 박상면 배우가 넘버 3에서 맡은 '재떨이' 배역을 연상시킨다. 세기말이라는 작품을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의 두 번째 영화'라는 점을 부각시키 위해서였겠지만, 제 2의 넘버 3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 들을 실망시키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영화를 실패한 손능한 감독이 영화계를 떠났다고 하면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믿는 사람도 많지만, 넘버 3를 만든 감독은 영화계에서 놓아줄리가 없다. 이명세 감독이 첫사랑(1990)을 찍고 '1편을 흥행 시키면 앞으로 2편은 더 망해도 된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박찬욱 감독이나 곽경택 감독이 3번째 영화에서 흥행한 것을 생각하면 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송능한 감독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충무로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2001년 태흥영화와 함께 '넘버 3, 2'라고 할 수 있는 '38광땡'이라는 작품을 준비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21세기판 넘버 3가 될 작품이라는 언급과 함께 송능한 감독도 '20세기는 신물난다. 이제 전망을 찾고 싶다. 이렇게 살면 근사하지 않겠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세기말과 다른 영화를 선보일 계획은 분명 갖고 있었다.


영화가 엎어지는 것은 것은 정말 흔한일이라, 충무로에 도는 시나리오 백 권 중에 정말 영화가 완성되어 극장에 걸리는 작품은 한 두편이 고작이 아닐까 싶다. 기획 단계에서 표류해서 10년 이상 지난 뒤에 엎어지는 경우도 영화계에서는 흔한 일이었고 송능한 감독도 그렇게 여러 기획 단계에서 엎어지는 것을 겪다가 자연스럽게 충무로에서 멀어진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지구를 지켜라(2003)의 장준환 감독은 '저주받은 걸작'인 데뷔작 이후로 화이(2013)로 복귀 할 때 까지 10년 넘게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의 소리를 들었는데, 장준환 감독이 10년 동안 영화계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타짜 2(가칭)'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참여를 했지만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 이전까지 결실을 내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 손능한 감독도 그런 비슷한 흐름 위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괴물로 스타덤에 오른 봉준호 감독이 송능한 감독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충무로를 떠난 송능한 감독에 대한 러브콜은 끊이지 않았을 것 같지만, 실제로 영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송능한 감독의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나 했는데, 송능한 감독의 이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 셀린 송 감독의 아벼지로서.

송능한 감독이 캐나다 이민을 선택 했을까 많은 추측 중에서 소수 의견 중에 하나가 따님의 교육 때문이었다고 하는데(오동진 영화 평론가는 칼럼에서 송능한 감독의 캐나다 이민 이유 중에 하나로 16대 총선으로 보여진 고착화된 지역간 대립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따님의 교육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송능한 감독의 팬으로 이렇게 다시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뻤다. 물론 영화로 돌아왔다면 더 기뻤겠지만.


셀린 송 감독에 대한 많은 인터뷰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게 되는데, 심지어 파묘 무대인사에서 최민식 배우에게 넘버 3 당시 셀린 송 감독과의 인연을 물어본 기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최민식 배우는 넘버 3 촬영 당시 송능한 감독의 자택에서 찍은 장면도 여럿 있는데, 당시 만났던 꼬마가 커서 세계적인 감독이 되어 돌아온 것에 무척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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