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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날 Jun 09. 2024

영화에서 만난 블러드 칫

비행사의 생명줄

매주 뭔가 영화로 썰을 풀 아이디어를 찾는데 고생하고 있는데, 마침 어느 분이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서 카이지가 입고 나온 태극기 그려진 점퍼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시기에, 좋은 영화 썰 아이템이라고 생각하고 덥석 물었다.(저번 주에 올리지 못한 것은 아이템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본 다녀오느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87년 영화 '태양의 제국'에서 크리스찬 베일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제이미 '짐' 그레이엄이 입고 나오는 재킷이 있다. 영화 전반부에 만난 미국인 조종사에게 받은 재킷으로 등에 커다랗게 청전백일기와 함께 한자가 적혀있는데, 영화 내내 입고 나온다.

어렸을 때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 중일 전쟁에 대한 밀리터리 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청천백일기가 그려진 재킷을 입은 미국인 조종사가 왜 중일 전쟁 한복판에 존재하는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저 재킷의 정체도 미국인 조종사의 정체도 알게 되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에 비해 공군이 압도적인 열세였기 때문에, 일본의 전략 폭격 등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아시아에서 일본의 위협을 같이 느끼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직접적으로 파병을 할 수 없었던 미국은 '의용병'이라는 편법으로 전투기와 조종사를 지원하게 된다.

2개 중대 정도의 소규모였지만, 꽤 선전했고 일본군은 중국 공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실력을 갖춘 이 미국 비행대에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격추된 조종사를 포로로 잡기 위해 꽤 철저한 수색 작전을 펼쳤다.

어떤 전쟁에서도 격추된 조종사가 복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중일 전쟁을 다룬 영화는 아니지만 보스니아 내전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에너미 라인스(2001)같이 추락한 전투기에서 탈출한 조종사가 복귀하는 내용의 영화가 있다. 에너미 라인스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배경의 영화 BAT 21 추락한 전자전기에서 탈출한 항법사 역을 연기한 진 헤크먼 배우가 출연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BAT 21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너무 멀리 나갔는데, 다시 태양의 제국의 주인공인 짐이 입고 있는 청천 백일기가 그려진 쟈켓은 중일전쟁 당시 플라잉 타이거즈 대원들이 불시착했을 때, 중국어를 할 수 없어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양인은 우리(중국)를 도와 싸우러 왔다. 군민 모두 도움을 줘라'라고 국민당 정부의 당부가 한자로 적어 놓은 것이다.

이걸 블러드 칫(Blood Chit)이라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최초의 블러드 칫은 미국에 열기구 시연을 하러 온 프랑스 열기구 조종사 장 피에르 블랑샤르를 위해 영어로 쓰인 천을 들려준 것이 맨 처음이라고 하고, 1차 대전 당시에도 말이 안 통하는 다른 나라에서 싸우는 조종사들에게 다양한 블러드 칫을 들려줬다고 한다. 플라잉 타이거즈의 경우처럼 등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천 위에 다양한 언어로 구조를 당부하는 글을 쓰인 경우가 더 많았다.

'생사혈부(The Blood Chit)'라는 중일 전쟁 당시 불시착한 미국인 조종사를 중국인들이 힘을 모아 탈출시키는 내용의 중국 드라마가 있다. 지금의 중국과 미국의 군사적 긴장을 생각하면 조금 낯설기까지도 한데. 플라잉 타이거즈는 아니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1944년 5월 6일 후베이성 한커우(현재는 후베이성 우한시의 일부)에 위치한 일본 기지를 폭격하러 출격한 글렌 베네다 중위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추락하고 중국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연히 중국어는 한마디로 할 수 없었지만 블러드 칫 덕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플라잉 타이거즈의 이야기를 당시 할리우드가 놓칠 리가 없기 때문에 '플라잉 타이거즈(1942)'라는 존 웨인 주연의 영화도 있다.

카이지가 입은 재킷의 블러드 칫은 한국전쟁 당시 블러드 칫에 제일 인지도 높은 플라잉 타이거즈의 청천 백일기 블러드 칫을 조합한 것이다. 왜 그걸 그렇게 조합했는지는 모르겠다. 한국 전쟁 블러드 칫이니까 태극기가 당연히 들어가지만, 청천백일기가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블러드 칫이 활약했고, 블러드 칫의 도움으로 복귀한 조종사가 42명이라고 한다.

영화 탑건에서 톰 아저씨가 입고 나온 재킷의 국기가 카이지가 입고 나온 재킷의 국기 구성이 비슷해서 블러드 칫이 아니라 이걸 흉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카이지가 입고 나온 것은 블러드 칫이 맞고. 탑건의 이 국기 문양은 블러드 칫이 아니라 1963-64년도 U.S.S GALVESTON의 동 아시아 항해를 기념하는 패치다. 1200명의 해군을 일본과 대만으로 운송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패치에 일본 국기와 대만 국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십 년 뒤인 탑건 매버릭에서는 이 패치가 1985-86년도 인도양 항해로 바뀌어 있는 데다. 일장기와 청천백일기가 사라졌다. 두 개의 중국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청천백일기를 빼면서 일장기도 같이 빠진 모양인데. 불편한 뉘앙스로 이 탑건의 패치가 바뀐 걸 지적하는 예비역 미 해군 중령의 칼럼을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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