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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날 Feb 12. 2021

짜장면은 어떻게 한국 대표 요리가 되었나?

한국 화교 흥망사.

한국 짜장면이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가 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국에서 화교가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는지와 맞닿아 있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화폐개혁을 단행해서 지하 경제를 수면 위로 올리려고 했다. 이 화폐개혁은 현금을 꿍쳐두는 걸로 유명한 화교에 큰 타격을 입혔다. 화폐개혁은 화교에 타격을 입힐 목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니지만 1962년에 입법한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외국인토지법은 한국 화교들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히고 한국에서의 경제적 입지를 줄일 목적으로 제정한 법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한국 화교는 임오군란 이후에 한국에 들어와 불평등 조약을 등에 업고 부를 쌓은 다음에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부역하는 형태로 부를 유지했다. 게다가 해방 직후에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상황을 이용해서 큰 이익을 얻었는데 1946년 전체 수입 총액의 82%가 1948년에는 52.5%가 화상을 통한 무역이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화교의 경제력을 위협적으로 생각한 것은 과민한 반응은 아니었다.

카프의 일원이었던 월북작가 엄흥섭의 단편소설 '파산선고'(1930)는 화교 자본에 몰락하는 평양 소상인을 그린 작품이다. 김동인 작가의 '감자(고구마)'를 비롯해서 당시의 소설에서 한반도에서 화교가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1970년에 법이 개정되면서 화교의 토지 소유는 가능해졌지만 점포는 50평, 땅은 200평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남은 많은 화교들이 50평 안에서 영업이 가능한 중국집으로 업종을 바꾸기 시작했다.

화교들이 식당으로 업종을 전환한 70년대는 중국집을 운영하기에 좋은 시절이었다. 정부가 혼분식을 장려하면서 밀가루 음식을 파는 식당을 지원해줬기 때문에 짜장면과 짬뽕은 중국집의 메인 메뉴로 떠올랐다. 물론 중국집에서 쌀로 만든 음식을 파는 걸 금지했으니 짜장면과 짬뽕을 주로 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교 중식당은 장사가 잘되어도 가게를 늘리기 어려웠다. 식당으로 시작해서 호텔까지 올리는 것이 화교의 흐름이지만, 외국인토지법 때문에 아무리 장사가 잘되도 가게를 확장하는 것은 어려웠다. 믿을 만한 한국 국적의 친구에게 부탁해서 명의로 옮겨 놓았다가, 막상 친구가 죽고 친구의 자녀들이 소송으로 '아버지의 땅'을 돌려받은 사례도 있고. 아서원 같이 대법원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조선공산당을 낳은 황금동 아서원

아서원은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위치했던 중화요릿집으로 화교 서광빈 씨가 1907년(자료에 따라서는 1918년)에 문을 연 중화요릿집으로 규모로는 서울 안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라 1925년에 '조선 공산당 창건식'이 아서원에서 열린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로는 아서원에 가서 기생을 끼고 흥청망청 노는 것이 요즘의 '플렉스'였기 때문에, 아서원에서 무전취식으로 술판을 벌이다가 신문에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이 아서원이 1969년에 시가의 5분의 1도 안 되는 6천만 원에 반도 호텔을 인수한 롯데 호텔에 팔리는 사건이 있었다. 땅을 판 것은 서광빈 씨의 외동딸이었지만, 화교의 사업체가 모두 그렇듯 26명의 대주주가 존재하는 일종의 주식회사였다. 주주 중에 한 명인 서광빈 씨의 딸이 다른 대주주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팔아 버린 것이다. 주주들은 서광빈 씨의 딸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었지만 대법원까지 가서 패소했다. 아서원의 대주주들은 화교라는 이유로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강한 것은 동남아시아가 발전하면서 부동산 시세가 치솟았고, 땅에 투자하는 전통이 있는 화교들이 큰 부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화교들이 중국 식당을 하게 된 이유가 점포 규모가 제한되기 때문이었다면, 많은 화교가 중국 식당을 때려치우고 미국이나 대만으로 떠난 이유 역시 점포 규모가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중국 식당을 열심히 운영해서 손님이 늘어나 규모를 늘려야 하는 순간이 오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식당을 확장하는데 가능한 선택의 수가 많지 않았다. 앞에서 이야기 한 절친한 한국인 친구 명의로 했다가 친구가 죽은 뒤에 돌려받지 못한 경우도 있고. 딸과 결혼한 한국인 사위 앞으로 돌리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경우였고, 한국인 직원 앞으로 명의를 돌렸다가 돌려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확장을 포기하고 가게를 정리해서 한국인에게 팔아넘기고 대만이나 친척이 자리 잡은 미국 등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집 이야기 중에 화교 주인이 대만이나 미국으로 떠나서 가게에서 배달하던 직원이 물려받았다는 이야기가 꽤 흔했다. 한국에 중국집이 그렇게 많은데도 막상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이 많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중화요리 레시피를 화교 커뮤니티 밖으로 돌리지 않는 화교지만 가게를 정리하면서 기본적인 레시피는 넘겨주기 마련인데,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짜장면이었고, 실제로도 만들기 가장 쉬운 메뉴도 짜장면이었다. 1948년부터 대량 생산된 사자표 춘장 덕분에 모든 중국집이 비슷한 퀄리티로 짜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만두 전문점 '원보'에는 짜장면, 짬뽕 없습니다!라고 적혀있는데, 한국의 중화요릿집에서 짜장면과 짬뽕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한국의 짜장면이 어떻게 한국에서 대표적인 메뉴가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싶었는데. 화교가 어떻게 한국을 떠나게 되었는지 이야기가 끝도 없이 나왔어 분량 조절에 정말 실패했다. 한국 인스턴트 라면 이야기도 진짜 끝이 없이 산으로 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일단 다음 편은 억지로 일본 라멘 이야기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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