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는 옜날에 얼마나 귀했을까.
짜장면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할 생각은 없었는데, 짜장면 이야기가 순식간에 한국 화교의 역사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결국 짜장면과 라멘의 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도 못하고 끝났다.
쌀을 재배하는 곳에서는 밀 농사짓기 어렵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밀가루 음식이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중국은 쌀농사짓기 좋은 남쪽에서는 쌀농사를 지어도 북쪽에서는 밀을 먹어 중국에서 밀가루 음식은 대중적인 음식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잔치국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잔치집에서나 먹을 수 있었다. 긴 국수 가락이 인연과 장수를 뜻하기 때문에 잔치 국수는 결혼식과 회갑연에나 등장하는 고급 음식이다. 일본에서도 국수가 장수를 뜻하는데, 밀가루를 구하기 힘들어서 형태를 본뜬 소바(메밀국수)를 더 즐겨 먹는다. 일본에서는 섣달 그믐에 한해의 마무리로 해넘기기 소바(年越しそば토시코시 소바)를 먹는 풍습이 있다.
밀가루를 옛날에는 진가루(진말眞末)라고 불렀다는 것을 대장금으로 처음 알게 된 사람도 많은데, 가루 중에 가루라서 진가루라고 부를 정도로 밀가루가 귀했다.
그런 귀한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는 옛날에는 무척 귀한 음식이었다. 칼국수쯤 되면 먼 곳에서 소중한 친구가 왔을 때나 내어주는 최고급 요리었다. 요리책 조선신식무쌍제법에는 수제비가 운두병(雲頭餠)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잔치 음식에 소개되어 있다. 만드는 법을 보면 밀가루에 다진 고기와 파, 장, 기름, 후춧가루, 계핏가루를 넣어 되직하게 반죽해서 닭을 삶아낸 장국물에 반죽을 삶아 닭고기를 얹어 먹었다고 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수제비 하고는 완전히 다른 고급 요리였다.
좋은 밀가루는 수입이라도 하지 않으면 구하기 어려우니 한국도 일본도 밀가루 대신 보리 가루나 메밀가루로 만든 수제비에 대한 기록이 더 많이 남아있다. 쌀로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있는데, 쌀가루를 반죽해서 먹었다고 하면 떡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렇게 수제비는 고급 음식이었지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공통적으로 수제비는 배고팠던 시절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어 버렸다. 두 나라 모두 전쟁으로 인해 찢어지게 가난했을 때 그나마 구할 수 있었던 미국의 원조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기 때문이다.
구하기 힘들어 귀했던 밀가루는 미국의 원조로 제일 구하기 쉬운 식재료 중 하나가 되었고, 이 밀가루를 바탕으로 일본은 라멘을 한국은 짜장면 문화를 꽃피웠다. 이 두 음식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밀을 즐겨 먹는 가장 가까운 문화권이 중국이었으니 미국이 밀어 넣어준 밀가루를 자국의 문화로 받아들이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수제비에 대한 자료를 찾다 보면 밀가루로만 만든 수제비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고, 뭔가 다른 가루에 끈기를 내는 목적으로 밀가루가 살짝 들어간 정도가 고작이었다. 씰이나 보리, 메밀은 물론이고 보리 겨나 도토리 가루까지 다양했다. 그렇게 구하기 어려웠던 밀가루가 가장 구하기 쉬운 식재료 중 하나가 되리라고는 옛날에는 누구도 상상 못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