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 들고 슈퍼 가요”

한글날에 모여서

by 파인트리


한글날이라고 하니 아이들 어릴 때가 생각난다. 큰아이는 말이 조금 빨랐다. 어린아이 답지 않게 발음이 정확했고 의사 표현도 정확하게 설명을 해서 어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큰아이가 다섯 살쯤 되었고 아직 한글을 알지 못할 때였다. 어느 날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와 엄마가 좋아하는 캔 커피를 한 개를 들고 왔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놀라서 묻는 내 말에

“응 가게에서 내가 사 왔어요.”라고 큰아이는 또박또박 대답을 한다.

“엄마가 돈을 준 적이 없는데 무엇으로 샀어?” 물으니 씩 웃으면서

“내가 만들어서 샀어요.” 한다.

“만들어서 샀다고? 어떻게?” 어이없어하는 엄마의 질문에도 아이는 빙긋 웃기만 했다. 속으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옆집 슈퍼로 얼른 뛰어가 봤다.

“사장님! 우리 아이가 캔 커피랑 과자를 샀다고 저를 주던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내 물음에 사장님은 박장대소를 하신다. 그리고는 돌멩이 하나를 내미셨다.

“그 집 딸내미가 이 돌을 나한테 주고 초콜릿이랑 엄마 커피를 사 가겠다고 했어.”나는 놀래서 다시 물었다.

“이 돌멩이를 주고 사 갔다고요? 죄송해서 이 일을 어째요. 제가 돈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내 변명에 나이 많으셨던 사장님은 웃으시면서

“너무 귀엽잖아요. 애기가 돌이 돈인 줄 알았나 봐요. 내버려 둬요. 혼자 알아내는 날이 있을 테니까.”

그 후로도 우리 아이는 당당하게 돌을 주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몇 번 더 사가지고 왔다. 큰아이는 그 무렵 돈을 정확히 몰랐고 동생들과 돌멩이로 물건을 사고파는 소꿉놀이를 자주 하던 때였다. 아마도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돈`이 `돌` 로 들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딸아이가 물건을 사 온 날 저녁이면 아이가 지불한 돌멩이 대신 현금을 정산해 주러 부랴부랴 슈퍼를 찾아갔다. 어느 날은 돌멩이가 한 개인 날도 있었고 어느 날은 세 개나 있던 날도 있었다. 고마움과 죄송한 마음이 뒤엉킨 내 마음을 뚫어 보신 듯 사장님은

“기특한 꼬맹이가 꼭 엄마 준다고 커피를 사러 와요. 자기 먹을 것은 달랑 초콜릿 한 개를 챙기고.” 그러시면서 슈퍼 사장님은 우리 딸아이의 자라는 모습이 예쁘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고는 그냥 지켜봐야 하는지 당장 혼을 내고 가르쳐야 하는지 갈등하는 나를 위로했다.

“내버려 둬 봐요. 금방 스스로 알게 된다니까.”


다섯 살이 끝나가는 겨울 아이는 어느 날 아침 신문을 보고 있는 내 옆에서

“엄마! 이거 호호 아줌마 할 때 `호` 야.” 하면서 글자를 가리켰다. 아이는 그때 `호호아줌마`라는 애니메이션 비디오테이프를 하루에도 몇 번씩 즐겨보던 때였다. 아이가 짚고 있는 `호`자를 놀란 맘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또 아는 글자 있어?” 하고 내가 물었다.

“음~ 이거 아줌마 할 때 `아`” 아이는 너무나 자랑스럽고 환하게 `아` 자를 손가락으로 꼭 짚어주고 있었다. 나는 감동해서 아이를 끌어안고 이때다 싶어서 곧바로 돈과 돌이라는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정확한 뜻과 사용하는 방법도 설명을 해 줬다. 내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에게

“그동안 슈퍼 할머니께서 우리 딸내미가 돈과 돌의 뜻을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기다리자고 하셨어. 엄마가 혼내고 가르쳐야 한다고 했는데 기다리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어. 슈퍼할머니는 네가 조그만 손으로 돌을 들고 와서 항상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엄마 커피 주세요` 그러는 게 너무 귀여웠대. 그리고 그동안 딸내미가 슈퍼에 돌멩이 놓고 온 것은 엄마가 돈으로 그때마다 계산해 드렸어. 이제 돈이랑 돌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으니까 절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내 설명에 딸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머쓱하고 어색해하던 귀여운 웃음을 가득 안고 엄마인 나를 꼭 안아줬다. 아직도 내 기억에는 미안함에 폭 안겨오던 아이의 마음의 느낌이 그대로 있다.

‘이해의 선물’이라는 동화가 있다. 주인공은 어머니와 함께 위그든 씨가 운영하는 사탕가게를 자주 갔다. 어느 날은 사탕이 먹고 싶어서 혼자서 가게를 찾아가고 사탕을 골랐다. 돈은 있냐고 묻는 위그든 씨에게 주인공은 버찌씨앗을 내민다. 그리고는 사탕을 사려면 이것으로 모자라는지 묻는다. 위그든 씨는 돈이 남는다면서 1센트 동전 두 개를 거슬러 준다. 주인공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어항 가게를 한다. 어느 날 턱없이 적은 돈으로 물고기를 사러 온 어린 남매에게 어릴 적 위그든 씨에게서 받았던 친절이 생각나서 2센트를 거슬러 주면서 물고기를 안겨 보낸다.


이해의선물 책표지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 가족들은 한글날마다 돈과 돌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그 돈과 돌의 차이에는 진정한 어른이 계셔서 추억이 되고 이야기가 되었다. 만약 슈퍼 할머니의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없었다면 큰아이는 돌을 들고 갔을 때 야단만 맞았을 것이다. 놀래서 당황하는 젊은 엄마에게는 핀잔만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른은 달랐다. 젊은 엄마의 손을 잡고 달래주시고 자라는 아이를 지켜보자면서 즐거워하셨다. 그 어른의 표정이 나에게는 진정한 어른이 되게 하는 법을 일깨워 주는 모습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는 평생 간직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고, 글의 뜻을 정확히 알게 하는 교훈이 되기도 했다. 이제 내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다. 모여 앉아 지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아이들도 어딘가에서 언제라도 위그든 씨가 되어줄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 듯하다. 친절과 사랑도 배워야 몸에 스며드는 것인가 보다.


시골집앞 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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