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보험 해약 못한다.
취업 준비중인 막내에게
여섯 살 난 아이가 이마에 땀범벅이 되어 달려온다. 그리고는 단풍잎 같은 손을 내밀며 "엄마 보험 드세요." 한다. 아이는 자기 군 걷질 값은 보험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젊은 나는 아이의 이마에 젖어서 달라붙어 있는 머리를 정돈해 주면서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준다. 아이는 아이스크림과 작은 초콜릿 하나를 사들고 다시 뛰어온다.
우리는 그때 하던 사업이 급작스레 망해버리고 맨손이 되었다. 모든 걸 정리하니 조그만 가게방 하나 얻을 보증금 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들과 살아야 하니 뭐라도 시작하기로 했다. 돈 몇 푼 아끼려고 가게에서 놀게 내버려 둔 막둥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랑 있으니 좋은지 항상 조잘조잘 할 얘기도 많았다. 막둥이 혼자 노는 게 점점 안타까워 보였다. 직장을 다니는 친구 아이들을 우리 가게로 와서 놀게 했다. 아이들이 오면 가게 방에서 놀게 하고 나는 돈가스를 튀겨주고 라면을 끓여주면서 오래 놀다가도록 유인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는 가끔 미안한 마음에 `막둥이는 유치원 안 가고 싶어?` 물으면 `엄마랑 있는 게 좋아` 해맑게 웃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엘 갔다. 수업시간에 뭘 했냐 물으니,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따라 먼지들이 움직여서 먼지를 잡고 놀았단다.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지 먼지를 잡았냐고 혼을 냈다. 막내는 작고 귀여운 입을 삐죽이며 귀는 선생님 말씀을 분명히 들었고, 눈과 손으로만 먼지를 잡았단다.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후로 3학년인가 4학년인가 담임 선생님이 교육청 영재원에 보내기로 하셨다고 연락을 하셨다. 몇 가지 시험을 거쳤는데 충분한 자격이라고 했다. 어머나, 우리 딸내미 천재인가? 잠시 자식 사랑에 후끈 달았다.
하지만 젊은 엄마 아빠는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빴다. 남편과 나는 아침밥 숟갈을 뜨기 바쁘게 장사 준비를 했다. 안팎으로 청소 잘하기로 소문난 남편 덕분에 우리 손님들은 너그러웠다. 세 시간 전부터 예약 전화를 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하는 젊은 부부를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다면서 격려해 주시기도 하셨다. 칭찬해주시는 좋은 손님들과 공부 잘하는 아이들 덕분에 힘든 줄을 몰랐다. 눈뜨면 장사 준비를 했고 눈감으면 천당인지 지옥인지 모를 잠에 빠지는 날들을 보냈다.
숨 실틈 없이 일하는 엄마 아빠를 보는 아이들은 너무 빨리 배려라는 단어를 배워 버린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이가 버스 타고 영재 원을 다녀오다가 잠이 들어 버려서 종점까지 가버렸단다. 평소보다 훨씬 늦게 왔는데도 부모는 일하느라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어떤 날은 버스 노선을 잘못 타서 낯선 길을 보고 차 안에서 엉엉 울었단다. 놀랜 버스기사 아저씨가 영재원 가는 버스를 잡아서 태워 주신적도 있다고 했다. 그것도 몰랐었다. 성인이 되어서야 막내는 재미 삼아 그때 이야기를 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하면서 성적을 걱정하지 않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가더니 운동을 하겠단다. 갑자기 무슨 운동? 물으니 합기도란다. 남들은 하던 운동도 멈추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데 무슨 운동이냐고 물었다. 체력이 있어야 공부도 하는 법이니 운동을 시켜 달라고 했다. 이놈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심반 걱정 반으로 합기도를 시켜 주었다.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던 아이가 공부는 그만두고 운동만 하겠다고 했다. 합기도가 재밌단다. 무도 소녀, 멋있지 않으냐고 묻는다. 중2병은 중학교 때 있는 것이지 고2병 있단 말은 못 들어봤다고 하니까 자기가 새로 만든 병이라고 했다. 우리 막내는 그때가 사춘기였던 모양이었다.
아이가 방황하고 인생을 고민할 때도 엄마 아빠는 정신이 없었다. 그때가 아이들을 위해 진로를 상의해 주고 뭔가 피드백을 줘야 할 때였다. 그런데 부모인 우리는 일에 치여서 우리 자신의 진로에도 갈팡질팡하는 철없는 부모였다.
막내의 성적표가 수직 하강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거 시켜 줬으니 엄마가 원하는 성적표를 달라고 했다. 성적표를 주는 대신 체대를 갈 거라 했다. 고집불통이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 날 시험을 치르고 오더니 합기도장에 등록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래도 공부를 좀 해 봐야겠단다. 이과인데 수학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나름대로 수학 부심이 있어서 운동을 하면서도 자기 자존감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시험을 보고 반성을 했다고 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놈이었다.
우리 막둥이는 대학을 갔고 올봄에 졸업을 했다. 얼마 전까지 직장생활을 잠시 접은 엄마도 취준생 , 딸도 취준생, 둘이 마주칠 시간이 많았었다. 어느 날 밤 치킨과 맥주로 속마음을 얘기하다가 "엄마 보험 해약하셔야겠어요.'라고 했다. 세상살이가 어려워서 자신의 앞가림이나 하고 살지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옛날에 가게 할 때 엄마가 바쁘고 힘든 거 ~그거 너무 마음 아팠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런 이쁜 맘을 가진 막둥이의 표정이 너무 예뻤다.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 아닌가. 대학 간 이후로 부모에게 눈곱만큼도 걱정시킬 일은 한 적이 없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녀석이었다. 빨리 어른 되어 효도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서둘지도 말라고 했다, 엄마가 살아보니 세상에 급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 줬다. 빨리 무엇인가 결정이 되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준비를 잘했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라는 보장이 없으니 그 또한 얼마나 불안할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너무 걱정을 앞세우지는 말자고 다독였다. "막둥아 오죽하면 책 제목이 "아파야 청춘이다"라는 게 있을까? " 하고 위로를 하니 웃음도 예쁜 우리 막내 "엄마!! 아프면 병이 든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래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란다, 농담도 하고 , 마음도 열고.
참고로 막둥아~ 엄마는 이 보험 해약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