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안 타셔서 일을 그만 두신 줄 알았네.” 이른 새벽 정류장에 도착하니 먼저 와계시는 어르신이 말을 걸어온다.
“아, 출근시간이 조금 빨라져서 그동안 앞차를 탔어요. 오늘은 휴무라서 산에 가려고 나왔어요.”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을 만난 듯 내 일상을 얘기하고 있었다. 팔순 지난 친정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의 그 어르신과 나는 2년 동안 정류장에서 마주쳤지만 대화는 오늘이 처음이다.
“나는 가게에 가려고~” 어르신은 무릎에 올려놓은 쇼핑백을 다잡으면서 친구를 만난 듯 다정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제야 그분이 매일 아침 가게로 출근하는 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몇 마디 더 하는 사이에 버스가 도착해서 우리 대화는 끊겼다.
나이를 먹으니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 모르겠지만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같이 물건을 고를 때 이건 어떠냐고 물어오는 사람에게 ‘이건 아니네요. 저게 좋네요.’ 추천까지 해 주면서 말을 한다. 키오스크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나를 느끼기도 한다. 며칠 전 주차장에서 아이에게 겉옷을 입히려고 애쓰는 아버지와 안 입으려는 꼬맹이의 실랑이를 보았다. 아이 아빠는 다른 한 손으로 더 어린 아가를 안고 있었다. 나는 대뜸 도망가는 아이를 붙잡아서 옷을 입혀 주었다. 그런 나의 행동을 곁에서 보던 큰딸은
“엄마!! 남의 아이에게 그렇게 막~ 물어보지도 않고~!!” 딸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추우니까 아빠가 안타까워하잖아. 아빠들은 옷을 잘 못 입혀.” 나의 자연스러운 대꾸에 "에이, 그래도 물어보고 입혀 줘야지~~" 큰딸은 내게 작은 핀잔을 준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행동이 앞선 내가 나인지 의아했다.
나로 하여금 행동을 유발하는 내 안의 의식은 무엇일까?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일까? 그렇다면 이런 거침없는 행동들을 해 놓고는 놀라는 나는 누구인가? 그동안 행동하고 싶어 했지만 참아 왔던 것일까? 낯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말을 섞는 행동도, 누구에겐가 거침없이 친절을 베푸는 행동도, 예전의 나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태도들이다. 친절을 베풀어야 할 때도 누군가 해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지 내가 나서지는 않았다. 바름과 옳음과 정의는 알았지만 사람들 앞에 선뜻 나서지도 않았고, 작은 친절을 베풀 때도 받는 사람이 어찌 생각할지 그저 조심스러워했다. 그런데 요즘 내가 변했다. 조심스레 변해있는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 이게 고민이고 우울이다. 곱게 나이 먹는 것인지, 고집스럽게 나이 먹는 것인지~
얼마 전에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자 다른 승객의 목발이 버스 밖으로 스르르 밀려 나갔다. 마침 내리려던 나는 “기사님!! 기다려요”를 외치고 목발을 집어다 드리고 내렸다. 예전의 나라면 이렇게 큰소리로 기다리라고 할 수 있었을까? 혼자 내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갑자기 이렇게 용감해진 내가 부끄럽고 낯설다.
딸내미에게 물었다.
“딸아!! 엄마가 요즘 우울해.” 엄마의 고민에 딸내미가 가까이 앉는다.
“엄마 뭔 일인데~~”
딸아이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니 그냥 마음이 편해진다.
“엄마가 그동안 용감하지 않아서 도와줘야 하는 상황에서도 망설이던 사람인데 지금은 거침없이 행동을 해. 그렇게 거침없는 행동을 해 놓고는 엄마가 더 놀래. 그리고 요즘 또 하나 고민은 엄마보다 어린 친구들이 엄마를 좋아한다고 하고 존경한다고 하는 게 너무 어색해. 엄마는 그냥 엄마 나이를 살아왔을 뿐인데, 멋있게 사는 거 같다고 말해주는 것도 어색해. 특별히 무엇을 크게 이루어 놓은 것도 아닌데 젊은 친구들에게 괜찮은 어른으로 보이는 것도 미안해. 그런 마음들이 엄마를 우울하게 해.”
내가 주저리주저리 길게 늘어놓는 말을 큰딸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했다.
“엄마! 엄마는 젊은 사람들이 못 가진 세월을 가졌어. 그리고 엄마라는 자리도 잘 지켜 줬고. 사실 젊은 사람들은 부모로 살아갈 세월이 힘들게 느껴지거든, 그런데 엄마는 이미 살았잖아. 그러니까 부럽다, 존경한다 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엄마는 계속 사람들을 챙기는 일을 해 왔잖아. 엄마가 소극적인 사람이었어도 그 챙기는 세월 동안 엄마도 모르게, 엄마의 몸속에 훈련이 되어 있었던 거지. 그래서 거침없는 행동을 하게 된 거고. 그런 엄마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그동안은 엄마가 너무 바빠서 그런 엄마 자신을 느끼지도 못했던 거지. 사실 그동안은 우리 엄마 너무 바쁘게 살았잖아. 요즘 엄마가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글을 쓰고 생각을 하다 보니 예전의 엄마 자신과 비교를 하게 된 것 같아.”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는 큰딸은 가만가만 나를 위로했다.
“엄마는 나이를 먹은 게 아니라 세월을 가진 거야.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엄마의 세월을~ 그러니까 존경받아도 되고, 낯설어하지 않아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