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버스처럼 활주로를 달릴 때는 공항에 착륙하는 다른 비행기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천천히 활주로를 돌아갈 때는 바퀴의 움직임이 내 몸을 타고 느껴진다. 죽을 것처럼 도움닫기를 해서 궁둥이를 힘껏 밀어 올려 이륙을 할 때는 적당한 긴장의 맛이 있다. 비행기에서만 느껴지는 기분이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멀미하듯 깊은 잠에 빠져 버려서 비행을 즐기지 못했다. 깊은 잠이 드는 듯 마는 듯 비몽사몽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항상 막판까지 죽도록 일을 하다가 휴가를 떠나니 가는 시간 내내 잠만 자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비행기 밑의 풍경을 알지 못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잠들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고 좌석도 창가를 부탁했다.
비행기 밑에 하얀 구름이 설원처럼 펼쳐져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시골집 평야에서 보았던 겨울 풍경 같다. 같은 모양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뭉툭뭉툭 하얀 계단이 불규칙하게 늘어져 있어 짓다가 만 공사장 같다. 변화 없는 모양이 시간이 흐를수록 지루하고 심심하다. 하늘 위의 풍경은 이렇듯 심심했던가? 모르던 사실이다.
남들이 재미없다고 집어던진 책에서는 작가의 마음을 찾아내서 읽어 보기도 하고, 주인공의 취향을 따라가며 읽기도 해서 나는 재미없는 책이 없다. 재미없다는 영화도 음악을 따라가면서 보거나, 눈빛을 따라가면서 보거나, 내용에 집중하거나,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재미가 있어서 심심하지 않다. 이렇듯 남들이 심심하고 지루한 것에서도 재밌게 노는 특기가 있는 나는 비행기 밖의 지루함을 보면서도 재밌다.
창밖의 구름은 손으로 만지면 눈사람을 만들 수 있게 뭉쳐질 것 같다. 종아리를 감싼 털 장화를 신고 내려가면 푹푹 빠지는 소리가 나며 뽀드득거릴 것만 같다. 노란색 물감을 뿌려 병아리구름을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어디쯤 알라딘의 양탄자가 시원하게 구름 위를 날아오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구름 속 설원을 힘차게 달려오는 만주벌판의 독립투사가 생각나고. 끝없이 펼쳐진 김제평야의 설원 속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던 오리 떼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끔 땅에서 올려다본 구름은 다양한 모양의 예쁨이 있었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깃 털 같은 연기구름도 있고, 양털구름이 몽글몽글 마음을 따뜻하게도 했다. 얇은 실비단 같은 구름은 금방 흩어져 버릴 듯 가녀린 안쓰러움도 있다. 거대한 먹구름은 비를 몰고 와서 세상을 덮어버릴 듯 힘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하늘에서 내려다본 구름은 지루하고 심심해기만 한데, 지상에서 올려다본 구름은 변화무쌍했다. 우여곡절 많은 우리네 인생사 같다.
`딸들은 키워놓으면 비행기를 태운다`는 말로 딸 많은 나를 어른들이 위로했다. 그런데 그 위로가 현실이 되었다. PPT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딸들은 여행계획을 내밀었다. 얼마나 준비하고 계획했는지, 엄마 컨디션이 난조를 보일 때의 예까지 기준을 정해 놓은 내용이었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준비하느라 지쳐서 정작 여행을 즐기지 못했다. 가기 전에도 준비, 돌아와서는 뒷 마무리, 아이 셋을 치닥꺼리 하면서 내 기분을 즐기기엔 항상 피로가 먼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숟가락만 얹은 꼴이다. 나는 정말 눈곱만큼도 준비 없이 입은 채로 몸만 비행기에 실었다. 성인이 다 된 세 딸들이 모든 준비와 일정을 진행했다. 아, 편하고 오지다.
비행기 밖은 여전히 구름뿐이다. 그래도 괜찮다. 심심도 재밌다. 비행기아래 한결같이 꿋꿋한 구름의 풍경에도 그저 재밌는 구석이 있다.